까닭이 없는 게 아니다 - 김장호
백화점 앞에 이동 헌혈차 세워두고
적십자 모자에 흰 가운의 여자
팔을 잡고 헌혈하라 한다
팔짱끼듯 부탁하니 기분이 좋아져
못 이기는 척하고 싶지만
여태껏 들어준 적이 없다
사전검사에서 적격판정을 받았지만
까닭이 없는 게 아니다
갈 길이 무척 바쁜 것도 아니고,
내 몸의 금쪽같은 피
결코 아까워서도 아니다
한 여자만 사랑하는 재두루미처럼
한 여자만 살뜰하게 보살피는 가물치처럼
그렇게 떳떳치 못해서다
사랑하는 그대에게 줄
순결한 피가 아닌 까닭이다
바람둥이 아비의 피가 흐르는
화냥질한 어미의 피가 흐르는
내 몸속의 지워지지 않는 붉은 자국
*시집, 나는 을이다, 한국문연
손빨래 - 김장호
칸나가 붉게 타오르는 꽃밭
고추잠자리 한 마리
꽃 위를 맴돌며 슬픔을 말리고 있다
슬픔을 말리고 싶은 날
불혹을 넘긴 사내가 손빨래*를 한다
땀에 절은 슬픔의 모양과 빛깔
빨래판에 빡빡 문질러
베란다 건조대에 매달면
옷에 달라붙은 축축한 슬픔이 쏟아진다
빛바랜 감색 작업복 주머니 속
사내의 헛기침과 너털웃음
아내의 물기어린 목소리
땀에 젖은 가슴도 끄집어내
뽀송뽀송해지도록 말린다
오늘처럼 슬픔을 말리고 싶은 날
사내는 세탁기 대신 손빨래를 한다
건너편 옥상에서 빨간 반바지의 여자
세탁기에 돌린 옷가지를 널고 있다
*손빨래는 자위에 관한 은어
# <나는 을이다>는 시인의 첫 시집이다. 시집 맨 첫 장에 안 쓰고는 못 배길 정도로 쓸쓸해서 시를 쓴다는 시인의 말이 인상적이다. 나도 패러디를 해서 한 마디 보탠다. 안 읽고는 못 배길 정도로 쓸쓸해서 시를 읽는다고,,,, 아래는 시인의 말 전문이다.
시인의 말
내 시를 쓰는 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쓸쓸해서다.
안 쓰고는 못 배길 정도로
너무 쓸쓸해서다.
내 시를 쓰는 것은
안 쓰고는 못 배길 정도로
쓸쓸해서다, 그렇다고
이토록 쓸쓸한 까닭만 아니다.
내 시를 쓰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게 아니다.
이 세상 날 닮은 또 한 사람, 을乙에게
마당귀에 없는 듯 서 있는
싸리비가 되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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