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상처가 없으면 그리움도 없으리 - 김명인

마루안 2015. 1. 27. 09:51



상처가 없으면 그리움도 없으리 - 김명인

 


철썩이며 부서지는 파도의 실패들
감았다 풀었다 되감는
이것을 놀이라 할까?
태곳적부터 펼쳐놓은 실마리니
파도는 써버릴 무료 무진장 남아 있다
넘볼 수 없는 해발의 아득한 넓이
푸르둥둥한 걸신들이 저녁을 끌고 온다
가장 낮은 현을 건드리는 고요
내가 못 견디는 쓰라림
나 혼자 맛보려니, 사람아
상처가 없으면 그리움도 없으리!
어림잡아 그대는 일만 리 밖에 서고
나는 한 육십 리쯤에 그대를 당겨놓고
차감하니 수평 너머에 뜨는 불빛
까마득하여 분간이 안 되는 그 불빛으로
꽝꽝 언 마음 녹이느니
이 어로(漁撈) 얼어붙은 겨울 밤바다가 일찍 잠근다
결심은 거추장스럽고 너무 많은 어둠 밀려와
파도는 파도 소리밖에 업을 줄 모른다



*시집, 여행자 나무, 문학과지성








어두워지다 - 김명인



다짐하는 일도 흐려버리는 일도 누구에겐가
지독한 빛이어서 극광까지
밀려가버렸다고 깨닫는 지금
구름다리도 걷혀버린 강 이쪽에서
건너편 저무는 버드나무 숲 바라본다
얽혀 자욱하던 눈발도
그 속으로 불려 나가던 길들도 그쳤는데
어스름 저녁 답은 무슨 일로 한참을 서성거리며
망명지에선 듯 서쪽 하늘 지켜보게 하는가
사랑이여, 다 잃고 난 뒤에야
무릎 꺾어 꿇어앉히는 마음의 이 청승
쟁쟁한 바람이 쇳된 억새머리 갈아엎으면
내가 쏜 화살에 맞아
절룩이며 산등성이를 넘어간 그 짐승
밤새도록 흘렸을 피 같은 어둠 몰려온다





# 김명인 시인은 1946년 경북 울진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동두천>, <머나먼 곳 스와니>, <물 건너는 사람>, <푸른 강아지와 놀다>, <바닷가의 장례>, <길의 침묵>, <바다의 아코디언>, <파문>, <꽃차례>, <여행자 나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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