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소금사막에 뜨는 별 - 이은규

마루안 2015. 1. 27. 21:19



소금사막에 뜨는 별 - 이은규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다


꿈꿔야 할 문장은
잠언이 아닌, 모래바람을 향해 눈뜰 수 있는
한 줄 선언이어야 할 것
사막 쪽으로 비껴 부는 바람


꿈으로도 꿈꾸던 달의 계곡 지나 이국의 마을
바다에서 솟아오른 사막이 있다
당신은 물을까, 왜 소금사막이어야 하는지


만약 그리움이라는 지명이 있다면
비 내린 소금사막에 비치는 구름 근처일 것이다
끝없이 피어올라도
다시 피어오를 만큼의 기억을 간직한 구름


빗물 고인 소금사막에 떠 있는 기억의 신기루
그 풍경을 손에 담으면 구름을 간직할 수 있을까
간직을 꿈꾸게 하는 이름들
구름과 당신이 같은 종족임을 말하지 않겠다


소금사막에 밤이 오면
별, 하늘을 찢고 나온 고통 한 점


오래 쏟아지는 별빛에 살갗이 아플까
당신은 이불깃을 끌어당기며 움츠리겠지
다독이다 뒤척이다
럼주를 구하러 마을을 기웃거리면
문득, 골목 끝 비상약 파는 가게에서
발효된 사탕수수 향을 맡게 되겠지
운명은 종종 독주를 비상약으로 처방하고
그 밤 우리의 감행에 동의하는 이들이 있을까


버리고 가자는 말보다
다만, 두고 가자
잠언에 시달리다 감행을 포기하는 당신이라면
영원을 기다린 선언은 소금알갱이로 부서지겠지
당신에게 소금사막은 여러 지명 중 하나


저만치 비상약이 보이는
밤의 창문을, 서성이다 가는 바람



*시집, 다정한 호칭, 문학동네








오래된 근황 - 이은규



내 지문을 기억하는 건 그의 지문이 아니다
깍지 낀 손의 기억이 식어가므로
아직 완성하지 못한 문장의 페이지가 아닐까
노트 속 마침표 대신 찍힌 지문들


급한 약속이 생겨난 듯 내가 사라지면 , 그는 간발의 차이로 때를 놓쳐버린 손님처럼 지난 시절을 잠시 후회할지도 모른다
너무 늦게 왔다는 후회는 쉽게 씌어진 문장과 같고


이번 생에선 마주치지 말자
일찍 이루어진 꿈, 서늘하겠다


노트의 시간이 멈추면, 주인을 잃은 내 책상 모서리는 혼자 닳아가겠지 불면의 베갯잇에 머리카락 몇 올, 검은 외투 안쪽 주머니엔 무엇이 남아 있을까
혹시 깜박 잊고 두고 간 마음 따위


그러나 근황 이어지다
사과 주름이 깊어질 때까지 바라만 보는 화가와 같이
하루 한 줄만 쓴다, 마침표와 지문 사이
문득 떠오르는 어느 학자의 말
세상의 모든 책보다 숨겨놓은 포도주 한 병이 더 향기롭다
기억의 풍경이 기우는 동안


안부는 없고 오늘도 조금밖에 죽지 못했다*
지문의 문장을 마치기에 이른, 먼



*세사르 바예호, <아가페>에서.





# 이은규 시인은 1978년 서울 출생으로 광주대 문예창작과 및 同 대학원을 졸업했고 한양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고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도 시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다정한 호칭>이 있다. 언뜻 남자 이름처럼 보이나 본명은 이은실로 여성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