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연명치료 중단을 告함 - 김연종

마루안 2015. 1. 24. 10:29



연명치료 중단을 告함 - 김연종



나는 죽음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다
목숨을 담보로
삶의 고통을 덜어내고자 함도 아니다
그저 마지막 길을 당당하게 걷고자 함이다
이제 모니터로는 남은 생을 기록할 수 없으니
내 몸에 부착된 고통의 계기판을 제거하고
가장 편안한 단추의 상복을 부탁한다
덩굴식물처럼 팔을 친친 감고 있는 링거줄
산소처럼 고요한 인공호흡기
울음 섞인 미음을 받아 삼키던 레빈튜브
충전이 바닥난 심장을 감시하느라
한시도 모눈종이의 눈금을 벗어나지 못한
심전도 모니터링을 모두 제거해 주기 바란다
일체의 심폐소생술 또한 거부한다
사유의 파동이 사라진 육신의 신호음은
한낱 기계적 박동일 뿐이니
에피네피린과 도파민의 사용을 원치 않는다
기계의 호흡과 심박동은 이미 어긋났으니
심장마사지는 사양한다
썩은 육신을 인수해 갈 가족과
상한 영혼을 거두어 갈 神과 조우의 시간,
내 죄값을 흥정하는 비굴한 모습을 원치 않으니
침대 주변을 말끔히 정리해 주기 부탁한다
이제 종언을 告하노니,
여태껏 밀린 치료비와 남은 죄값은
저당 잡힌 내 생의 이력서에 함께 청구해 주기 바란다



*시집, 히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 지혜








돌팔이 의사의 생존법 - 김연종



그 앞에선 모두가 시한부 인생이다 몸 속 깊은 시한부 목숨을 족집게로 끄집어내어 벼랑 끝에 매달아 놓은 재주가 그에게 있다 중병 같은 긴 세월을 간단히 건너 뛸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워왔기 때문이다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병력을 컴퓨터 자판에 두드리면 네모 번듯한 운세가 슬픈 바코드로 떠오른다 아무 이유 없이 궁합이 맞지 않듯 아무런 인과관계 없는 죽음도 허다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부침(浮沈)을 거듭하는 전봇대의 전단지처럼 생사의 모호한 경계를 건너온 사람들이 참새처럼 몸을 떨고 있다 수 만 볼트의 전깃줄에 꿈적도 하지 않는 참새 한 마리, 발바닥이 간지러운지 끊임없이 발 바꾸기를 한다 벼랑 끝에서 당당한 맨발은 없다 오늘도 그는 시한부 선고중이다





# 아주 독특한 형식의 시집 하나를 발견했다. 의사 출신에 현재 내과 의사이기도 한 김연종 시인이다. 한 권의 시집에서 블로그에 올릴 딱 두 편을 골라내기에도 벅찬 시집이 수두룩한데 이 시집에는 공감 가는 시가 너무 많다. 다소 낯선 형식에도 불구하고 술술 읽히는 시가 매우 흥미롭다. 찬찬히 음미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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