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저쪽 - 정일근
잘 가라, 인사하지 않아도
시간은 떠나가 무덤으로 간다
사람들은 떠나가는 시간과 함께 흘러가
둥그런 시간의 무덤 속에 길게 눕는다
살은 썩고 뼈는 풍화되는 세월
무심한 촉루 위로 잡풀 무성히 돋는 세월만
아주 저 속에 누워 있구나
이제 그 사람 얼굴 희미하고
그날의 애절한 슬픔 무덤덤한 무덤으로 남았다
저 무덤 속 세월에 한 줌 뼈인들 남았으리
호호했던 사랑의 마음인들 붉은 흔적 있으랴
짧은 흰 십자가 그림자 길어지는
오후의 공동묘지 쓸쓸히 지나며
움켜잡아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는 잡풀 같은
세월의 저쪽을 붙잡는다
슬프다, 탄식하지 않아도
사람도 시간도 시나브로 빠져나가
둥그런 무덤으로 남은 세월의 저쪽
미움도 그리움도 없는 저쪽
*시집,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 푸른숲
가을 화엄 - 정일근
마침내 가을 산문에 당도했구나 병든 몸들아
한로 찬이슬에 차가이 씻고 이제는 맨발로 걸어야겠구나
여기까지 따라온 사유의 뼈들이 달그락거리고
꽉 조인 허리띠 밑의 지친 삶도 슬금슬금 풀어지는 시간
땅에 뿌리 박은 나무의 잎들과 잎들의 뿌리가 마르는구나
부질없이 나를 덮는 잠이여 나는 욕심 없이 돌아가려니
기름져 병든 육신 저 화엄 아궁이 속에 불을 지피고
그 불 밑의 재, 재 밑의 따뜻한 한 줌 온기로 잠들고 싶구나
가을 화엄에 올라 겸허한 나무의 마음으로 서면
안맹의 눈으로도 흘러가는 시간을 볼 수 있으려니
내 그리움의 흰 뼈와 그 뼈 속의 붉은 피
붉은 피 속의 윤회의 유전자까지 진실로 나는 보고싶구나
가을은 깊은 산 속으로 달아나며 불을 지르고
너무 쉽게 노래하지 말아라 인후여
가을 인후여
노래하지 않아도 내 마음의 화엄은 저리 불타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잎 지고 차가운 서리 내리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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