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북극의 이름 - 여태천

마루안 2014. 11. 29. 20:42

 

 

북극의 이름 - 여태천


백야의 아주 먼 하루에는
납작해진 시간들이 있다.
자정 넘어까지 살아남아 더 얇아진
북극 여자의 얼굴과
그 여자의 눈을 닮은 별이 뜨고
지상의 이름들이 하나같이 조용하다.

아득하게 멀리 있는 표면에서
마음의 주름들이 흘러내리고
주르룩 쏟아지는 희고 투명한 북극의 밤
그런 밤이 서운해
나는 아이슬란드 어느 마을의 길고 가난한 이름 하나를
지도 위에 천천히 옮겨 쓰고는
들여다보는 것이다.

하늘의 주름들이 펼쳐 보이는
영사(映寫)의 비밀

공원, 신호등, 교차로, 그리고
영하 일 도의 공기와 그 사이에서 빛나는 눈과
초속 삼십 킬로미터로 달리는 이 별의 속도와
결국 너무 얇아진 밤에 대해
고민하는 한 사람

지도 위에서나 알아볼 수 있는 아주 먼 하루에
나는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이 난청(難聽)의 세계와
영혼을 덮고 있는 마지막 신체를
천천히 복기(復記)한다.


*시집,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 민음사

 

 




유성(流星) - 여태천


내가 기다리는 거기에서
나의 기억이 만들어 낸 바로 거기까지
당신이 있다.
있다가 없다.
백 년의 이별
그렇게 사라지는 이 모든 착란은
기다림 때문이다.
그러니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왔다.

멀리 가 본 자들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안다는데,
생의 바깥에서만 안쪽이 필요한 법
계산이 안 나오는 것들이여.
눈을 감아도 보이는 어둠이여.

1977년의 내 은빛 보이저 1호는 어디쯤 갔을까.
백 년쯤 지나면
당신의 끝에 도착할 수 있는 걸까.

백 년쯤 멀리 있는 눈이 반짝 빛난다.
백 년쯤 후에야
나는 당신과 이별을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백 년이 필요하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다.




# 여태천 시인은 1971년 경남 하동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국외자들>, <스윙>,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가고>가 있다. 2008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동덕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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