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깨어지기 쉬운 - 최서림

마루안 2014. 11. 29. 10:00



깨어지기 쉬운 - 최서림



한때는 기타 치며 흥얼거리던
팝의 사랑노래가
점차 남의 노래로 들리는 나이,
초등학교 때 라디오로 듣던 뽕짝이
드디어 내 노래로
더는 촌스럽지 않은 노래로 살갗을 파고드네
바람처럼 지나가는 소소한 농담에도
피가 서늘하게 굳어지는
늙은 조개처럼 무뎌진 나이,
지천명이란 껍데기만 남은 말,
맞대고 싸울 힘이 다 빠져버린 나이,
태풍 휩쓸고 지나간 섬처럼 황량한 세상
여기저기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뼈가 부러지는 듯
온몸으로 아려오네
벌써 구멍이 막히고 딱딱해져
자잘하게 깨어지고 금이 가기 쉬운, 하지만
왕창 깨어지지는 않는 기술을 안으로부터 터득한 나이,
아직은 푸른 잎사귀들이 비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스산한 숲속 같은 인생의 9월,
별 수 없이, 단풍을 준비할 줄 알아야 하는 나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을
한순간 몸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최서림 시집, 물금, 세계사








아픈 소리들 - 최서림



굴참나무 주름진 밑동 같은 저 사내의 인생에는
얼마나 곡절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을까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이 골목의 처마들 아래에는
얼마나 쓸쓸한 노래들이 많이 매달려 있을까


자신이 주워 모은 폐지처럼 더럽게 구겨진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리어카로 내다 파는 인생


60년대로 거슬러 간 이 생경한 골목길에는
또 얼마나 뼈아픈 소리들이 많이 굴러다니고 있을까


감당할 수도 없이, 아무런 상관도 없이 너무 맑아 우울한 가을 하늘
지하방에서 햇살줄기들을 야금야금 뜯어먹고 있는


돌아서면 편하게 잊어버리고 마는 딱딱한 감각의 벽 안에서
그 소리들, 생쥐모양 내 마음의 현을 밤 새워 쥐어 뜯고 있다






# 누가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 했던가. 계절도 詩도 스산함을 더하면서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다. 오십대 이후의 쓸쓸함을 이토록 절절하게 표현한 시가 있을까. 뜬구름 잡는 시가 너무 많은 요즘, 이런 시는 보석처럼 느껴진다. 시 읽기에 좋은 계절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월의 저쪽 - 정일근  (0) 2014.11.29
정해진 이별 - 황학주  (0) 2014.11.29
괄호 안의 생 - 최대희  (0) 2014.11.29
그는 나의 무엇일까 - 홍윤숙  (0) 2014.11.29
상처가 꽃을 보다 - 조길성  (0) 2014.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