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의 무엇일까 - 홍윤숙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엄습해오는
정체 모를 그림자, 아니 그림자 같은 물체 하나
형상은 있으나 얼굴은 없으니
사람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다가오는
그 덩치는 오동나무 크기만큼 우람하다
항상 내 주위를 맴돌며
안개 같은 포승줄로 찬찬히 에워싸고
목이며 가슴이며 지그시 조여온다
소리를 지를 수도 밀쳐낼 수도 없고
그 어떤 항의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어쩌다 그를 벗어나 혼자 멍하니 지쳐 있을 때
그는 빤히 나를 들여다보며
무어라 말할 것 같지만 결코 말하지 않고
장승처럼 버티다 돌아서는 그의 등은
문득 앙상하게 마른 나뭇등걸 같기도 하다
장난으로 그의 등을 툭 치면
그 자리에 폭삭 삭아 없어질 것도 같은 허약함
죽음 같은 침묵과 집요함과 위협적이면서
허약한 그,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정체
그는 나의 무엇일까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 문학동네
빈 항아리 10 - 홍윤숙
그 빈 항아리 속엔
태어난 이유 하나로 목숨의 업을 지고
멀고 아득한 길 팔십 년을 걸어온
부서지고 병든 순례자 하나
낙일에 누워 잠들어 있습니다
한때는 무모한 방랑의 꿈도 꾸었고
출구 없는 미로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허황한 젊음이란 폭풍의 가시밭길 신고했지만
그 영욕과 회한 한 솥에 끓여
이제는 삭은 술 한 동이 빚어 마시고
생의 남은 길 가보지 않은 길 앞에 섰습니다
주신 목숨 열심히 지켜온 전말
그분께 보고하러 부르시는 날 기다리며
빈 항아리 구석구석 쌓인 먼지 털어내고
혈관 갈피갈피 낀 지방 한 점 한 점 뜯어내며
되도록 드높이 날기 위해
갈고 저미고 부수고 비워내어
민들레 홀씨 같은 가벼운 깃털 하나 만들고자
날마다 골몰하고 있습니다
금빛 노을 한 조각
왕관처럼 머리에 얹고
눈을 뜨는 겨울 아침 빈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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