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마루안 2014. 11. 17. 21:31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서른 전, 꼭 되짚어 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린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 아는 체 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 속맘으론 낼, 모레쯤
화해 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 소리로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지 못할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며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 라고 두 번 소리내어 말해 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부턴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끈한 국밥 한 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다
 


 *시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작과비평

 







어떤 갠 날 - 이면우



운전기사 뒷머리 면도자국 파르스름하다
그는 파란불 켜진 건널목 세 개를 연달아 통과했다.


생의 어떤 날은 구름 한점 없는 하늘 펼쳐지기도 한다,고
나는 말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러나 휴일 외곽도로에서
텅 빈 버스의 굉장한 속도에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공기 가득 음악 품은 듯 서늘히 저항하는 오전
지금 이 행운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그러나
아주 잠깐 새 깨닫도록 된 나이인 것이다.


그렇다 핸들 쥔 저 장갑의 시리도록 흰 빛은 이윽고
땅에 떨어진 목련꽃잎처럼 누렇게 바랠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하늘의 보상처럼 햇빛 공기 속도가
핏속에 녹아드는 중인 청년에게 나는 소리없이
띄엄띄엄, 생각나는 대로 말을 건넨다.


행운을 꽉 움켜쥐려 하지 말고
가볍게, 계속 끌고 가라고
바로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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