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솔직해집시다 - 김민정

마루안 2014. 11. 21. 20:56



솔직해집시다 - 김민정



사정 후 덜 싸맨 콘돔을 창에 던지는 건
그 남자의 오랜 투구법
창을 만나 창에 안겨 창을 더럽히는 계란 흰자
축농증의 콧물로 마사지하는 건
그 여자의 오랜 미용법


남자의 어깨 근육이 늘어났다 줄어드는 만큼
오그라들었다 벌어지는 여자의 모공 속에서
싹이 났다 잎이 났다 썩어 문드러지는 감자
창밖으로 툭 던지는 안녕을 기념이나 할까


서로 마주한 채 쪼그려 앉은 그들이
하얀 침대 시트 위에 오줌을 누기 시작한다
누가 더 노랄까 누가 더 지릴까 김을 내며
오롯이 합이 되는 유일한 찰나,


남자가 엊저녁 스포츠 신문을 시트 위에 깐다
밥이 왔으므로 서둘러 밥상을 차려야 하므로
배가 부르지 않고서는 절대
여자는 남자를 사랑할 수 없으므로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문학과지성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 김민정



천안역이었다
연착된 막차를 홀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톡톡 이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플랫폼 위에서 한 노숙자가 발톱을 깎고 있었다
해진 군용 점퍼 그 아래로는 팬티 바람이었다
가랑이 새로 굽슬 삐져나온 털이 더럽게도 까맸다
아가씨, 나 삼백 원만 너무 추워서 그래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이거 말고 자판기 커피 말이야 거 달달한 거
삼백 원짜리 밀크 커피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서울행 열차가 10분 더 연착될 예정이라는 문구가
전광판 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천안두리인력파출소
안내시스템 여성부 대표전화 041-566-1989
순간 다급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어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게서 따뜻한 커피 캔이 만져졌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던 그 시였던가
여성부를 이성부로 읽던 밤이었다






# 김민정 시인은 1976년 인천 출생으로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을 수료했다.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가 있다. 2007년 박인환 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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