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이루기 위해 - 배정원
내 마음은 모두 방전해버린 건전지
아니, 그 이전에 못쓰게 된 비에 젖은 건전지
이 길은 어디에서부터 휘어져 목을 감아오는가
날개를 잊은 까마귀떼들 거리를 활보하는 밤
마음은 다시 길을 떠나는구나
자신이 쓴 비극 속에서
검은 잉크를 풀어 머리를 감는 늙은 광대여
침잠하라, 낮은 포복으로, 찢긴 날개로 비상하라!
오래 전에 말라버린 혀를 씹으며
그대는 심연의 우물 속을 들여다 보았는가
바람만이 목을 적셔줄 때
다리가 잘린 붉은 전갈처럼 나는
달구어진 모래 위를 기어 별빛에 오르고자
하였다 뒤집혀진 운명은
지금 어느 길모퉁이를 서성이는가
다시 충전될 수 없는
잘못 쓰여진 각본대로 저질러진 날들이여
나는 대사를 잊은 배우처럼 서 있다
주제를 저버린 말들은 창자 속에서 부패되고
전사들은 술병 속으로 기어드는 장막극
아무도 심연의 우물물을 마시지 못할 것이다
한 편의 비극을 이루기 위해
그대는 뛰어들어 솟구칠 것인가, 주저앉을 것인가
*시집, 지루한 유언, 청년정신
지루한 유언 - 배정원
그의 유언은 정말 길었다
초저녁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던 긴 문장은
서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의 최후를 지키느라 며칠밤을 뜬 눈으로 지샌
그의 부인과, 자식들과, 며느리들은
물 먹은 두루마리 휴지처럼 지쳤다
쏟아지는 피로와 졸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죽음의 目前에 선 아버님이
마지막 말씀을 하시는데 졸 수야 있나
그들은 이를 악물고 견뎌야 했다
가습기 소리 클클거리는 겨울밤도 길었지만
그의 유언은 한참 더 길었다
달싹거리는 마른 입술 사이로 말들은 집요하게
끊임없이 새어나왔다 마침내는
그의 유언이 식솔들의 인내를 이겼다
제일 먼저 며느리들이 졸더니 다음은 자식들이
급기야는 그의 부인도 먼저 눈을 감았다
창 밖은 창백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창 밖에선 기다리다 지친 저승사자마저
쪼그리고 앉아 잠들어 있었다
# 배정원 시인은 1966년 서울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2년 문화일보 동계 시부분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지루한 유언>이 첫 시집이다. 오래된 시집에서 골라낸 두 편의 시가 확 마음을 헤집는다. 유통기한이 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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