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비에게 길을 묻다 - 권대웅

마루안 2014. 3. 3. 19:32



봄비에게 길을 묻다 - 권대웅

 


봄비 속을 걷다
어스름 저녁 골목길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담장 너머
휘파람 소리처럼 휙휙 손을 뻗어
봄비를 빨아들이는 나뭇가지들
묵은 살결 벗겨내며 저녁의 몸바꿈으로 분주한데
봄비에 아롱아롱 추억의 잔뿌리 꿈틀거리는
내 몸의 깊은 골목은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저녁 여섯 시에 퍼지는 종소리는
과거 현재 미래 한데 섞이고
비의 기억 속에서 양파냄새가 나
빗줄기에 부푼 불빛들
창문에 어른거리는 얼굴들 얼룩져
봄비에 용서해야 할 것이 어디 미움뿐이랴
잊어야 할 것이 사랑뿐이랴
생각하며 망연자실 길을 잃다
어스름 저녁
하늘의 무수한 기억, 기억 속으로 떨어지는
종아리 같은 저 빗물들
봄비에 솟아나는 생살들은 아프건만



*시집,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 문학동네

 

 
 





인생 - 권대웅

 


구름을 볼 때마다
달팽이가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느릿느릿 지게를 짊어진 할아버지처럼
밤하늘의 달을 볼 때마다
세간이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 같았습니다
흥했다 망했다 살다 간 아버지처럼
그렇습죠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겠어요
하늘에 세 들어 사는
구름처럼 달처럼
모두 세월에 방을 얻어
전세 살다 가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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