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삼류영화 - 조항록

마루안 2014. 2. 24. 23:31



삼류영화 - 조항록



보름 만에 어린 여공들은 외출을 했다
철야에 익숙해진 질긴 속눈썹에 화장을 하고
라면 봉지 같은 얼굴로
휘황한 상가를 갈 곳 없이 구경했다 물뱀처럼
쇼윈도에 반짝이며 떠다니는 빈혈증
씨줄날줄이 가득 엉켜 어두운 고향 이야기며
제대 앞둔 오빠가 복권을 사기 시작했다는 말 따위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갈 곳 없이 삼삼오오 영화관에 들어서면
대사 몇 마디 없는 삼류여배우의
삼류영화 몸으로 이야기하고 우는
스크린 위로 찌르르찌르르 어지럽게 흐러내리는 눈물
코끝 맵게 영화가 끝나고 침묵을 털어내면
날리는 싸늘한 한 줌 먼지



*시집, 지나가나 슬픔, 천년의시작








한국영화 - 조항록



영화는 한국영화가 최고입니다


생애에 대한 극명한 사실주의, 철 지난 바닷가에 눈물바다인 이별이 있고 최후의 사람들도 떠난 폐광촌에서 휘어진 젓가락을 두드리는 작부의 과거 따위, 밑도 끝도 없이 돌출하는 신파조 장면이, 정말 있는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어느 관객이 그 슬픔을 모르겠습니까. 슬픔을 슬픔으로 말하는 진실의 유치함에 함께 울어주겠습니까. 기립박수를 치겠습니다. 관객이 들지 않는 그토록 썰렁하고 아무도 없는 생애를 보여주는, 영화는 한국영화가 진실입니다.


지루했던 영화를 참을성 있게 다 보고, 느리게 일어서는 한국 영화처럼 사는 한국사람들, 완벽한 즐거움과 상상을 초월하기를 기대했던 관객들은(그들은 불안한 권태에 질려 있습니다) 새삼 자신들의 생애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호스테스 누이가 있는 대학생과 불륜을 꿈꿔보는 중년들, 따분해진 연인들과 가족에게 차마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 실직자, 부신 눈을 가리며 같은 문으로 걸어나가는 그 관객들이, 어쩔 수 없는 한국영화의 어쩔 수 없는 주인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