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길의 미식가 - 이용한

마루안 2013. 12. 26. 00:56



길의 미식가 - 이용한


 
다시 난 길 떠날 것이다
여긴 비릿하지도 않고 덜컹거리지도 않으며 갸륵하지도 않다
난데없는 풍랑으로 며칠씩 섬에 발이 묶이고,
눈길에 미끄러진 애마를 시골 카센터에서 '야매'로 고치면서
다시 난 편서풍에 몸 맡길 것이다
아무래도 난 한계령 사스래나무가 알량한 연애보다 좋고
왕피천 노을이 충무로 극장보다 좋다
새벽 6시의 바닷바람에 난 미칠 것이고,
어느날 송계 동문쯤에서 주저앉을 것이다
애당초 좋은 시인 되기는 글렀으니,
내게는 시 한 줄보다 바람 한 줄기가 감개하고,
서랍 속의 장자보다 속 다 내놓은 산중 빈집이 무량하다
그리하여 난 주머니 속의 시간을 길에다 버릴 것이다
관계의 틈에서 내쳐질 것이며,
이 얽히고 설킨 연애의 덤불에서 벗어날 것이다
다시 난 31번 국도로 갈 것이고,
목포에서 배 탈 것이다
길이 다한 여인숙에서 구름 뜬 술이나 한잔 하면서
꽃 지는 창밖을 볼 것이다
때때로 수첩을 꺼내 도마령을 비추는 하현을 기록할 것이다
이 집도 절도 없는 정거장에서
다시 난 쓰디쓴 사랑을 할 것이다.



*시집, <안녕, 후두둑 씨>, 실천문학사

 







비 맞는 여인숙 - 이용한



그대 없는 별에서 오늘도
숙박계를 쓰고
지나친 추억과 1박한다
이번 세상은 너무 가혹해!
티끌 속을 날아다니는 것도 힘들군!
그 옛날 토벌대를 피해
개마고원을 타박타박 넘는 것만큼이나
더 이상 쫓기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부양할 가족도 없는데,
나는 왜 아직도 사춘기처럼 아픈가
나는 왜 자꾸만 속초 앞바다가 그리운가
이 비 맞는 여인숙에서
밤이면 독감처럼 파고드는-,
엽서만 한 그리움
아직도 추억의 뒷골목을 윤회하는
지구의 악몽
그 옛날 강원도에서의 내 꿈은 우편배달부였던가
그대 집 앞에 걸려 있던 낡은 우편함
끝내 편지 한 장 못 전하고
이렇게 나-, 느티나무처럼 늙어서
흐릿한 눈 속을 뒤덮는
커다란 적막,
이 쓸쓸한 유배지에서
다 끝난 망명정부처럼 나는 웃고 있네.

 

 




이용한 시인은 1968년 충북 제천 출생으로 199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정신은 아프다>, <안녕, 후두둑 씨>가 있다. 일찍부터 전국 각지의 오지를 떠돌며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록했고 지금도 바람처럼 세계의 오지를 여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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