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눈 감고 헤엄치기 - 최영미

마루안 2014. 1. 5. 10:09



눈 감고 헤엄치기 - 최영미


세상이 아름답다 말한다고
지구가 더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간판들로 둘러싸인 광장에서 큰 글씨로
꽃과 나무와 더불어 숲을, 숲에 묻혀 사는 낭만을
예쁘게 찬미 할 수 없는 나는--


밖에서 더 잘 보이게 만들어진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눈을 감고 헤엄치는 나의 언어들은--
요리사 마음대로 요리하기 쉬운, 도마 위에 오른 생선.
솜씨 없이 무딘 칼에도 무방비일지언정
내 시에 향수와 방부제를 뿌리지 않겠다.


자신의 약점을 보이지 않는 시를 나는 믿지 않는다.



*시집, 돼지들에게, 실천문학사








나의 여행 - 최영미



거리에서 여행가방만 봐도
떠나고 싶어


세계지도를 펼치면
거기쯤에 있을 것 같아
내가 떠나온 고향이


흥분의 지퍼를 밀고 당기고
가방 속에 아침과 저녁이 들어왔다, 나갔다
자면서도 계산기를 두드리다


그날이  다가오면
이미 진이 빠져


터미널에 내려
무서운 자유의 광풍이 불면
전 생애를 끌고 어그적 어그적,
하룻밤 잘 곳을 찾아


다음날 아침에는 지도를 보며
새로운 도시를 정복할
구두의 끈을 단단히 조였다


길을 잃어본 자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 문학동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비린 저녁 일요일 - 이병률  (0) 2014.02.07
환관의 무덤 - 문동만  (0) 2014.01.06
길의 미식가 - 이용한  (0) 2013.12.26
그 사랑에 대해 쓴다 - 유하  (0) 2013.12.03
내가 산이 되기 위하여 - 이근배  (0) 2013.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