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 안상학
세상 살면서 한 곳쯤은 그리워하면서 살아야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내 이미 사랑을 품은
그런 한 곳쯤은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지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래, 세상 살면서 한 사람쯤은 그리워해야지
내 아직 한 번이라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았지만
그 한 사람쯤은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지
그렇다지, 그곳 그 땅은 지는 꽃만 품안에 안는다지
지는 꽃이 흙이 되어 땅빛이 붉다지
그 땅에서 피는 꽃 또한 붉다지
날이 갈수록 붉어지는 가슴이여
*안상학 시집, 안동소주, 실천문학
오래된 엽서 - 안상학
오래된 어제 나는 섬으로 걸어 들어간 적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엽서를 썼다. 걸어 들어갈 수 없는
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며 뭍으로 걸어나간 우체부를 생각했다.
바다가 보이는 종려나무 그늘에 앉아
술에 취해 걸어오는 청춘의 파도를 수없이 만나고
헤어졌다, 그러나 단 한 번 헤어진 그 사람처럼 아프지 않았다.
섬 둘레로 저녁노을이 불을 놓으면
담배를 피우며 돌아오는 통통배의 만선깃발, 문득
돌아오지 않는 그 사람이 걸어간 곳의 날씨를 걱정했다.
아주 오래된 그 때 나는 섬 한 바퀴 걸었다. 바다로
걸어가는 것과 걸어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다 잠든 아침
또 한 척의 배가 떠나는 길을 따라 그곳을 걸어나왔다.
아주 오래된 오늘
오래된 책 속에서
그 때 뭍으로 걸어갔던 그 엽서를 다시 만났다.
울고 있다. 오래된 어제 그 섬에서 눈물도 함께 보냈던가
기억 저 편 묻혀 있던 섬이 떠오른다. 아직 혼자다.
나를 불러, 혼자 있어도 외로워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던 그 섬
다시 나를 부르고 있다. 아직도 어깨를 겯고 싶어하는 사랑도 함께.
안상학 시인은 1962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 생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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