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상가에 모인 구두들 - 유홍준

마루안 2013. 6. 1. 07:16



가에 모인 구두들 - 유홍준


 
저녁 喪家(상가)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상가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 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두고
봉투 받어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북천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시집, 상가에 모인 구두들, 실천문학사


 






저울의 귀환 - 유홍준


 
쇠고기 한 근을 샀다
하얀 목장갑 낀 정육점 여자의 손이
손에 익은 한 근의 무게를 베어 저울 위에 얹었다
주검의 일부를 받아 안은
저울 바늘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저울이
내게 물었다 인간들의 약속이란 고작
이 한 근의 무게가 모자란다고 보태거나 넘친다고 떼어내는 것?
맞아 저쪽 봉우리에서 더 먼 저쪽 봉우리로
주먹만한 고깃덩어리들이 고단한 날개를 저어 날아가는 황혼녘
국거리 쇠고기 한 근 담아 들고
부스럭대는 비닐봉지 흔들며 늙은 어머니를 찾아가면
저울을 떨게 만든 이 한 뭉텅이 주검의 무게가
왜 이렇게 가벼운가 문득
저울대가 된 나의 팔이여
모든 것을 들어냈을 때 비로소 평안을 얻는
빈 저울의 침묵이여 나는 제로에서 출발한 커다란 고깃덩어리
주검을 다는 저울 위에 올라가 보고서야 겨우
제 몸뚱어리 무게를 아는 백열 근짜리
四肢(사지) 덜렁거리는 人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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