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산수유꽃 피기 전 - 강인한

마루안 2013. 5. 5. 22:56



산수유꽃 피기 전 - 강인한

 


산수유꽃 피기 전
해야 할 일 못다한 것이
바람 속에 왜 이제사 생각나는지


아프다
아픔을 견디다 견디다
혼자 눈떠보는 밤이 있다


어떤 나무의 죽은 가지에
새 속잎이 돋는 걸까
아프게 아프게
연초록의 어린 사랑이 피어나는 걸까


오래 잊었던 일
새록새록 죄 다짐으로 살아나서


아픔의 잎잎이
내 안에서 돋아난다
사금파리처럼


때로는 붉은 번개로
창자를 긋는 밤이 있어
눈뜨는 홑겹의 외로움이 슬프다.



*시집, 황홀한 물살, 창작과비평
 
 



 



더러운 샹송 - 강인한



치렁치렁 겨울비가 내린다.
읍내의 장터 열 지은 독 항아리 위에
목포집, 광주집, 대전집에 비가 내리고
열심히 열심히 이미자를 불러제끼던 너의 애인
그 여자의 발가벗은 고무신짝 위에
결국은 배반당한 끝장 위에 비는 내린다.

파리한 약주 한 병 위에
주독 오른 노오란 눈깔 위에
거덜이 나고 묵사발이 되고 텅텅 비고 만 너의 정신 위에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끗발은
휘날리고 있을 때,
여자들은 개처럼 미닫이를 쳐부수고, 개처럼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움켜잡고, 개처럼 마룻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하나의 애인이 술잔을 집어던졌고 비가 내리고
또 하나의 애인이 소리소리 처울기 시작했고
방구석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진창으로
횃보처럼 엉켜 뒹굴었다.
일년내 미친 듯이 너의 아가리에 술을 퍼넣었고
비가 내리고 드디어 끝장이다.

함정에 빠진 두 마리 늑대, 가장 맹렬한
두 마리 상징

납작한 서로의 절망에 늘어붙어서
오백원짜리 비명을 내뿜는 이것은
의리이고 체면이고 살아 있는 양심이다.
대전집, 광주집, 목포집의 쉰내나는 포장 위에
끝없이 비는 내리고
썰렁하게 식어버린 핏대 위를 걸어가는 발자국
겨울보다 쉽게 지워져가는
멀어져가는 너의 청춘의 발자국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