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는 그리워만 할 뿐이다 - 이문재
-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오늘 하루도 영 정갈하지 못하다
어제는 불길했고 또 그저께는 서툴렀다
가끔 계절이라는 것이 이 도시를 들렀다 간다 신기하다 나른해본 지도 오랜만이다 피곤으로 단단해지는 퇴적암들 나이에는
다들 금이 가 있다 비둘기 수백 마리가 16차선 도로를 가득 채우며 낮게 난다 새들도 도시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버린 성냥불 때문에 혹은 켜놓고 나온 컴퓨터 때문에 회사가 불타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생기면 잠이 안 온다
온갖 죽음의 아가리들이 도처에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게 보인다 퇴근길인데도 한 발짝도 떼놓을 수 없을 때가 있다 박모가 살얼음처럼 깔리고 갑자기 내가 아는 이름이 하나도 없어진다
옛날에 배가 자주 고프던 시절에 온몸을 활짝 펴고 햇빛 안으로 들어가 누운 적이 있었다 마치 내 몸에 엽록소가 있다는 듯이 마치 인상파 화가들이 그린 여름날 오전의 야외 식탁 같은 게 차려져 있다는 듯이 말이다 살이 많이 익었었다
시간에게 정갈하고 싶었다 세련되고 싶었다
내 유전자는 그리워하는 정보밖에는 가진 게 없다 아주 가끔 죽음처럼 옛날을 떠올리게 되는 아픈 날이면 유전자들이 모여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먼 반딧불이 우는 소리 말이다 그럴 때는 살아 있다는 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이문재 시집, 마음의 오지, 문학동네
노독(路毒) -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문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 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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