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퍼하지 마라 곧 밤이 온다 - 홍윤숙

마루안 2013. 2. 23. 22:53



슬퍼하지 마라 곧 밤이 온다 - 홍윤숙

 
 

슬퍼하지 마라 곧 밤이 온다
그러면 창변에 밀감빛 등불 켜지고
미뤄둔 편지 한두 줄 더 적어놓고
까마득한 시간 저편에서
가물가물 떠오르는 달빛 같은 얼굴도
만나지 않으랴
먼 강물 흐르는 소리 아득히 쫒아가다
고단한 잠에 들면
잠 속에서 그리던 꿈도 꿀 수 있느니
우물같이 깊고 아득한 둥지
따뜻하게 출렁이는 밤이 지나면
다시 새날의 해도 떠오르리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으면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면서
늘 무슨 일인가 하고 있다
주고 잃은 것만큼
어디선가 그만큼씩 채워지고 있는
빌수록 가득 차는 지상의 나날
이제 돌아갈 집도 멀지 않으니
슬퍼하지 마라 곧 밤이 온다

 


*홍윤숙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 문학동네


 
 



 
 
길을 걷다가 - 홍윤숙



길을 걷다가
잠깐씩 발을 멈추고 뒤돌아본다
잎 떨군 나무가지들이
기하학적 선으로 아름다운 문양을 그리고 있는
그 모양이 처음 본 세상처럼 신선하다
묘연한 길 끝 어딘가에
젊은 날 초상화 한 폭 떠오를 것도 같은
나는 다시 걷는다
가다가 다시 돌아본다. 돌아보는 일이 조금씩

즐거워진다
돌아볼 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리던
무수한 시간의 조각들이 끝도 없이 나르는 길을
오선지에 사분음표 도레미파 파미레도
오르내리는 악보처럼 찍으며 걸어간다
언제까지 이렇게 걸을 수 있을까
이 길에 머지 않아 겨울 깊어지고 얼음 깔리면
다시 구석진 골방 흰 벽에 갇혀서
공허한 허기를 삭은 등뼈로 버티겠지
오늘 아직은 남은 길에 햇살 따스하니
하루를 천 년처럼 누리며 간다

 


 


# 원로 시인 중의 한 분인 홍윤숙 선생의 시에서 들꽃같은 향기가 우러나온다. 긴 세월 시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서도 그 흔한 감투 하나 쓰지 않고 오직 시를 쓰며 들꽃처럼 사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시인의 성품답게 시에서 묻어나는 느낌이 정갈하기 짝이 없다. 이 시집을 보면 이것이 당신 생애의 마지막 시집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애틋한 노년의 정서가 짙게 깔려있고 시 하나하나에서 읽고 나면 진한 여운이 가슴으로 스며든다. 시인은 곧 밤이 오기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고 했지만 앞으로도 당신께서 발표하실 시집을 손꼽아 기다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