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시래기 한 움큼 - 공광규

마루안 2013. 2. 9. 05:55



시래기 한 움큼 - 공광규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경찰서까지 끌려 갔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 나올 때
시멘트 담벼락에 매달린 시래기를 한 움큼 빼어
냄새를 맡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치는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막무가내인 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언성을 높이고
기어코는 멱살 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사건을 화해시켜 돌려보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직장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 몫  보려는 주인은 그 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 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만큼이나 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하고 썩어빠진 도심의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평생 누구와 주먹다짐 한번 안 해본
산골 출신인 그는 경찰이 보는 앞에서
도시의 인심에게 주먹을 날렸다.
경찰서에 넘겨져 조서를 받던 그는
추운 유치장 바닥에서 도심의 피곤을 쉬다가
선잠에 들어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부시럭거리는.



*공광규 시집, 말똥 한 덩이, 실천문학사






 
 
소주병 -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공광규 시인은 1960년 충남 청양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1986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대학 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 <말똥 한 덩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