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길 잘했다 - 이상국

마루안 2013. 2. 8. 06:08



오길 잘했다 - 이상국



어느날 저녁 아파트 계단을 오르다가 자지러질 듯 우는 갓난애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아, 누군가 새로 왔구나
그리고 저것이 이제 나와 같은 별을 탔구나 하는 즐거움


티브이 속에서 줄줄이 잡혀가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을 향해
노골적으로 꼴좋다 꼴좋다 외치는 즐거움


아무 생각 없이 생을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다가
남 모르게 우주의 창고를 열어보는 이 든든함


때로 따뜻한 여자 속에서 내 그것이 죽어가는 즐거움


친구를 문상 가서 웃고 떠들다가 언젠가 저것들이 내 주검 앞에서 나를 흉보며 내 음식을 축내는 즐거움을 미리 보는 즐거움


어쩌다 공돈이 생긴 날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나무 이파리들이 멋도 모르고 바람에 뒤집어지는 걸 바라보며
아무래도 세상에 오길 잘했다는 이 즐거움 



*시집,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창작과비평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 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