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귓속에 꽃을 심어 놓았나 - 강회진
귀뚜라미 같기도 하고 여치 같기도 하고
초가을 밤 지리산 청령치쯤에서 들은
풀벌레 소리, 풀잎들 몸 비벼대는 푸른 소리
가끔 고향집 마당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
사립문 밖으로 사라지던 고라니의 뒷모습
무거운 돌을 덮고 가재처럼 모로 누우면
자꾸만 들리는 맑은 계곡 물 흐르는 소리
여름밤 보랏빛 도라지꽃 폭폭 터지는 소리
살얼음 속 보랏빛 노루귀 꽃대 오르는 소리
누가 내 귓속에 꽃을 심어 놓았나
늙은 엄마는 내가 홀로 늙어가는 증거라며
신세학원이구나, 봄비처럼 중얼거려요
이명은 밤마다 나를 낯선 지명으로 데려다 놓아요
낮은 수척하고 밤은 짙으니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 없어요
귀를 길게 늘이고
나는 이제 봄으로 살기로 했어요
*시집/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현대시학사
늙은 고향 - 강회진
어둔 숲 쪽에서 수리부엉이 울자
고라니 울음 풀쩍풀쩍 빈 마당 뛰어다닌다
배가 홀쭉한 길고양이들이 앙칼지게 울고
털 빠진 너구리들이 운다.
컹컹, 곤히 자고 있던 강아지 깨어 운다
소란스러운 밤
문 열고 마당에 나서니
눈 쌓인 앞산, 소나무들이 울고 있다
늙은 고향은 우는 것들 투성이
고향집 온도는 부모의 온도
점점 식어가는 고향의 온도
늙은 아비와 어미가 하루 종일 누워있는 방
반짝, 불 켜졌다 꺼진다
영원히 불 꺼진 방을 나는 견딜 수 있을까
# 강회진 시인은 충남 홍성 출생으로 1997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2004년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일요일의 우편배달부>, <반하다, 홀딱>,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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