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접히는 부분이 헐거운 골목 - 이성배

마루안 2022. 4. 27. 22:10

 

 

접히는 부분이 헐거운 골목 - 이성배

 

 

폐지를 줍던 노인이 치킨집 앞에서 상자 밑바닥의 테이프를 뜯자

골목이 헐렁헐렁해진다.

 

골목의 벽들은 갈라지고 기울어

바람의 마을을 재개발한 흔적이 역력하다.

 

어느 집이든

대문이나 현관 신발장에 노끈 뭉치나 테이프가 있는 것은

느닷없이 접히는 부분이 찢어지거나

밑이 빠지는 생활을 여미는 데 요긴하기 때문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주름진 몸이 수월하다는 듯

이 골목 사람들의 몸도 접히는 부분이 많다.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이 골목에서는 다 한 짐 거리

노끈으로 꽉 묶으면 그만

 

허리 굽은 노인이

모서리에 비가 샌 흔적이 있는 빈집을 질질 끌고 가는 사이

뒤쪽이 유리 테이프로 꼼꼼하게 여며진

달이 뜨고 있었다.

 

 

*시집/ 이 골목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고두미

 

 

 

 

 

 

꽃의 가계(家系) - 이성배

 

 

새 빌딩 오르는 자리는 연탄보일러를 때던 집이 있던 곳이다.

 

점심 무렵 공사장 바닥에 몸을 누인 사내의 잠은 받침목처럼 길고

그 비스듬한 방향으로 뙤약볕에 마늘 종지를 벌린 노인이 보인다.

화단 있던 자리, 마른 흙 움켜쥐고 큰금계국 줄기 하나가

노란 꽃을 달고 있다.

 

맨주먹 하나로 공중을 향해 긋는 푸른 가계도

꽃은 스스로 낸 길을 꺾거나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힘을 풀지 않는다.

 

밥줄 또한 시퍼렇게 가늘어서

바람 불지 않아도 꽃대가 울컥울컥 흔들리는 것처럼

밥을 먹을 때마다 목울대가 울컥울컥 뜨거워지는 것이다.

 

밥상머리에서 서로 오래 바라보지 못하는 식구들은

각자 공중을 향해 죽을힘으로 숨구멍을 불어 나가는 참

꽃은 그 죽을힘이 닿는 마지막 자리다.

 

작업복의 먼지를 털며 나오던 사내가

노인의 마지막 마늘 종지를 거두어 가자

가늘고 길었던 노인의 하루도 잠시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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