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재활용의 봄 - 이서화

마루안 2022. 4. 7. 21:35

 

 

재활용의 봄 - 이서화

 

 

장례식장에서 들려 나온 조화(弔花)가

다시 장례식장으로 실려 가고

목련도 해마다 조문을 다녀오는지

올해는 전년보다 꽃송이가 더 줄었다

 

3월 어디쯤에서 시들거나

빈자리를 골똘하게 골랐을 목련 꽃송이들

시든 꽃들을 뽑아내고 싱싱한 꽃들로 바꿔친,

어느 장례식장 목련실로 실려 갈

저 환한 봄

한 나무 아래에서 여러 번의 봄과 마주치듯

봄은 다만 꽃송이를 바꾸는 철인 것일까

 

뭐 어때,

한 그루 목련나무 아래서

몇 번의 고백을 바꿔치기하던 친구처럼

다시 봄을 끌고 온 목련

바꾸지 않으면 연애라는 말도 없다

장소와 풍경이 봄마다 연애하는 사이

장례식 꽃이 아름다워지는 시기가 되었다

 

나이 든다는 것은 마당 가의 꽃나무들 때문이다

두근거리는 봄은 늘 혼자가 아니고

숨어서 지켜보는 이별 때문이다

 

멀리서 보니 재활용이 봄을 활용하는지

봄이 재활용하는지

봄이 목련을 솎아내고 있다

 

 

*시집/ 날씨 하나를 샀다/ 여우난골

 

 

 

 

 

 

궁지라는 곳 - 이서화

 

 

모르겠다고?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

몰린 궁지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그러니 어떤 궁지도

열 달을 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열 달의 궁여지책 속에서

손이 생기고 눈과 입

그리고 울음이 생겼다는 것

 

허리를 한껏 구부리고 모로 누워서

그 궁여지책에 딱 맞는 자세로

더도 말고 한 달만 견디면

우리는 어디로든 벗어날 수 있다는 것

몰린다고, 몰렸다고 생각이 들겠지만

그곳에서 크고 있다는 것

 

궁지에 몰린 쥐가

구석을 무는 법은 없다

다만 출구, 그 출구 같은 고양이를

꽉 물고 죽을힘을 다해

나가려는 것 같아

우리는 우리의 뾰족한 울음을 앞세워

스스로 궁지를 벗어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