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 김명기 시집

마루안 2022. 3. 11. 21:26

 

 

 

시집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인이 있는데 김명기 시인이 그렇다. 어쩌다 이 시인에게 꽂혀 찐팬이 되었다. 누구 영향 받는 것을 지독히 싫어하는 성격이라 시인에 대한 호불호도 내 스스로 터득한 기술이다.

 

채이거나 엎어지면서 무릎팍이 까지는 온갖 생채기 뒤끝에 얻은 것이다. 나는 지금도 시인이나 평론가 등 명사들이 추천하는 책을 믿지 않는다. 처음부터 안 믿은 것은 아니다. 믿고 따라가 봤는데 별로였기에 가능한 따라가지 않는 것뿐이다.

 

그들의 지성을 존중한다. 그들은 좋은 책을 추천할 자격이 있다. 다만 내 능력 밖의 고급 수준이거나 나와 코드가 맞지 않아서다. 내가 아무리 독고다이라지만 귀를 완전히 막고 사는 것은 아니다. 思考도 고여 있으면 썩는다.

 

나라고 왜 확증편향이 없겠는가. 어쩌면 태극기 할배들 못지 않게 편향적일 수도 있겠다. 내가 성전환 수술을 하는 것만큼이나 보수정당을 지지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도 처음엔 내가 보순지 진본지도 몰랐는데 살면서 뒤늦게 굳어진 결론이다.

 

한 며칠 이 시집과 함께 하는 동안 행복했다. 시 읽는 재미가 이런 거구나를 알려줬다고 할까. 이 시인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유독 쓸쓸함이 밀려오는 시가 많다. 상처와 치유를 반복한 삶의 굴곡에서 얻은 시심일 것이다.

 

 

*잊고 살아도 잊히지 않듯
아무 일 없는 듯 지나쳐도
아무 일이 될 때가 있지
그저 봄볕 아래를 잠시 지나왔을 뿐인데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어긋나 버린
먹먹한 마음처럼

 

*시/ 춘양(春陽)/ 일부

 

 

시를 읽지 않고는 살아도 시 쓰지 않고는 못 사는 사람이 있다. 내가 보기에 이 시인이 그렇다. 마약이나 알콜 중독자처럼 시를 쓰지 않으면 수전증 때문에 살 수 없을 듯싶다.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시에서 그걸 느낀다.

 

 

*밥그릇 넘치도록 밥을 푸는 늙은 사내는
언제 씻었는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수저를 든 곱은 손이 온통 상처다
손가락 하나 굵기가 내 손가락 두 개 같다
손이 크니 상처도 두 배겠다

 

평생 저 손으로 벌어먹었을 텐데
저이는 왜 아직도 벅차 보일까
저러다 윤기 잃은 채
어느 담벼락 아래 쓰러지고 말
녹슨 쇠스랑 같은 사람

 

*시/ 상강/ 일부

 

 

김명기의 시가 좋은 것은 이렇게 낮은 곳을 향한 그의 따뜻한 시선 때문이다. 누구는 주식이나 아파트 시세를 연구하느라 바쁜데 시인은 잡초처럼 살아온 육체 노동자의 투박한 손에 눈길이 가는 것이다.

 

이것도 천성이다. 김명기 시인은 그동안 여러 직업을 거쳤다. 원양어선 선원, 중장비 기사, 산림 감시원, 유기동물 구조사 등 넥타이 매고 출근하는 안정된 직업이 아닌 위태위태한 밥벌이 용 직업이다. 그 경험에서 나온 버려진 동물에 관한 시가 이 시집에 여럿 실렸다.

 

 

*지상에 깃드는 날들이 내 것인 줄 알고 살았으나
지난 한때에 마음을 모두 두고 와
쓸쓸한 저녁 풍경이나 쫓아가는 몸은
참혹이란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뱉지도 못한다

 

*시/ 실려 가는 개들/ 일부

 

 

쓸쓸함이 잔뜩 묻은 시에서 가슴에 얹힌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을 받는다. 누가 시인을 맑은 영혼의 소유자라 했던가. 다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이 시집을 읽는 동안은 그 말이 맞다. 비록 튼튼한 밥벌이는 아닐지라도 이 땅에 이런 시인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