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通

월간 현대시 2월호, 발견 시

마루안 2022. 2. 21. 19:17

 

 

 

#김춘수 선생의 그 유명한 시 <꽃>의 첫 문장은 이렇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맞다. 구구절절 맞다. 이번 달 현대시에 나온 시 중에서 김승희 시인의 시가 그랬다.

 

아무리 좋은 시를 발표해도 독자가 읽어 주지 않는 시는 의미가 없다. 친분 있는 시인들끼리야 서로 읽어 주고 빨아 주며 품앗이를 하니 넘어 가자. 생각보다 시인들이 남의 시를 잘 읽지 않는다. 그저 글거리 소재로 활용할 때뿐 자기 시에 취해 사는 사람들이다.

 

시 읽는 사람보다 시 쓰는 사람이 더 많은 현실에서 써서 즐겁고 읽어서 괴로운 시 또한 얼마나 많던가.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에겐 관심 없고 오직 자기 차례에 부를 노래 찾는 것에 정신을 쏟는 것과 다름 없다.

 

이번 호에서 공감 가는 시 한 편 만나지 못하고 그냥 넘어 가나 했는데 김승희 선생의 시가 있어 다행이다. 눈과 귀에 팍 꽂히는 시를 발견하고 바로 필사에 들어간다. 우수가 지났어도 날씨는 더럽게 추운데 이런 시가 있어 위안이 된다.

 

 

 

가난에 대하여 - 김승희

 

 

가난은 전깃줄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반쯤 감전된 검은 까마귀들이거나
신문지로 덮어놓은 밥상
구타와 악다구니와 꽃밭 앞에 나동그라지는 세숫대야
천지는 인자하지 않단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
병들어서 어느 날 밤에 누군가는 생을 떠나고
아침 골목에 내놓은
연탄재 구멍 속에 누군가 파란 손목 두 개를 꽂아 놓았네


가난은 폭삭 끊어진 계단
계단이 없으면 천사도 안 오고 약장사도 안 오고
돈도 안 오고
밤새 눈 내려 얼어붙은 빙판길에 압정 같이 떨어진 별빛들
가난은 압정 같은 별빛을 밟고 걸었다

슬픔은 휘발되지 않더라
슬픔은 가라앉아 벽돌이 되기도 하더라
그 벽돌이 몸을 이기기도 하더라
벽돌 한 장 만한 마당에 꼬부랑 할머니가
세 살짜리 손녀와 앉아 채송화나 분꽃 씨앗을 심는 것
아욱을 바락바락 씻고 맑은 쌀뜨물에 된장을 살짝 풀듯이
어진 손이 그렇게 하는 것
천지는 인자하지 않지만
가난 속에서 어진 기운이 나오는 움틀임의 방향으로
그렇구나,
가난이 마지막 단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현대시, 2022년 2월호

 

 

 

소나기로부터의 자유 - 김승희


자유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
많은 자유 중에서도
소나기에 온몸을 흠뻑 적시고 빗 속을 갈 때
그 시원한 해방감이 나는 좋더라
한 줌의 빗방울
한 줌의 공기
한 줌의 하루
한번 망한 자에게 다시 망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해도
계속 내리는 비는
아픔도 새로운 비
새로운 구름이 새로운 소나기를 만든다네
쿠사마의 그림 속에 무한히 반복되는 물방울
미소 짓거나 목마름, 흐느낌이 배어나와
새로운 물방울이 새로운 구름을 만든다네
똑같은 호박은 없네
하루하루 그날그날
새로운 비가 새롭게 내린다네
새로운 빗방울마다 새로운 아픔이 박히네
똑같은 해방은 없네
새로운 아픔에 새로운 무거움
한번 망한 다음
소나기로부터의 자유는
무수한 소나기 속으로 그저 걸어 들어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