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안 되는 일이 많아 행복하다 - 이기철

마루안 2022. 2. 9. 22:26

 

 

안 되는 일이 많아 행복하다 - 이기철

 

 

깨진 유리잔은 소리친다, 다시 올 수 없다고

찢긴 페이지는 소리친다

잃어진 제 말의 짝을 찾아 달라고

 

나는 이 상실을 사랑한다

 

달리아를 국화꽃으로 만들 순 없다

새의 날개를 빌려 하늘을 날 순 없다

구름을 끌고 와 흰 운동화를 만들 순 없다

씨앗을 묻어 놓았다고 겨울이 안 오는 건 아니다

 

수심 일만 미터, 마리아나 해구를 장미원으로 만들 순 없다

 

사과나무가 안 보인다고 밤을 걷어 낼 순 없다

포도덩굴에게 오두막 지붕을 덮지 말라고 부탁할 순 없다

 

나는 끝내 이 집과 처마와 마당과 울타리와

울타리 아래 핀 물봉숭아를 미워할 순 없다

 

칫솔을 물고 쳐다본 하늘, 그 푸름을 베어

내 호주머니에 넣을 순 없다

아무리 수리해도 덧나는 들판을 내 손으로 고칠 순 없다

 

지은 지 십팔 년 된 집, 처음엔 그토록 경탄이던 집이

기둥과 대들보, 천장과 보일러가 자주 고장 난다

새뜻하던 타일과 서까래가 금이 가도 내 힘으로 안 된다

 

이렇게 쓰려 한 것이 아닌데 하고 다시 고치지 않는다

안 되는 일이 많아 행복한 일이 나의 동행이므로

 

 

*시집/ 영원 아래서 잠시/ 민음사

 

 

 

 

 

 

영원 아래서 잠시 - 이기철

 

 

모든 명사들은 헛되다
제 이름을 불러도 시간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금세기의 막내딸인 오늘이여
네가 선 자리는 유구와 무한 사이의 어디쯤인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영원은 대답하지 않는다

어제는 늙고 내일은 소년인가
오늘의 낮과 밤은 어디서 헤어지는가

이파리들이 꾸는 꿈은 새파랗고

영원은 제 명찰을 달고 순간이 쌓아 놓은 계단을 건너 간다

나날은 누구의 방문도 거절하지 않는다

이 윤슬 햇빛이 늙기 전에 나는

어느 철필도 쓰지 않은 사랑의 문장을 써야 한다

오래 견딘 돌이 체온을 버리는 시간

내가 다독여 주지 못한 찰나들이 발등에 쌓인다

무수한 결별의 오늘이 또 나를 떠난다

나는 여기에 현재의 우편번호를 쓸 수가 없다

 

 

 

 

# 이기철 시인은 1943년 경남 거창 출생으로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청산행>, <열하를 향하여>,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유리의 나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가장 따뜻한 책>, <흰 꽃 만지는 시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