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 - 최규환 시집

마루안 2021. 12. 23. 22:13

 

 

 

읽기 껄끄럽지 않으면서 스펀지에 물 스미듯 조금씩 가슴을 적셔오는 시집이 있다. 이 시집이 그랬다. 두 번째 시집이라는데 나는 처음 만난 시인이다. 1993년에 등단했으니 년식이 다소 오래 되었다.

 

그런데도 시에서 오래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반면에 시집 곳곳에 촘촘하게 새겨진 나이테의 단단함이 제대로 전달된다. 년식은 낡은 것이 아니라 적당히 숙성한 것이다. 시인의 말에 이런 문구를 남겼다.

 

오랜 기간의 공백이었으나

멀지 않은 날들의 기록이다.

예민하지 못했던 삶에게 값을 치르는 시간이었거나

스스로 익숙해지는 허물이었다.

 

자신을 설명하는 방법도 여럿이나 시인의 말은 이렇게 쓸 일이다. 가족에게 고맙다거나 아내에게 바친다거나 하는 일기장 메모 같은 시인의 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첫장에 실린 시인의 말을 읽고 이 시집을 골랐다고 해도 맞겠다.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많은 실정에서 쏟아지는 시집들 중에서 인연이 닿아야만 읽게 된다. 모든 시집을 다 읽을 수 없으니 제대로 된 시집을 고르기 위해 늘 고심한다. 이 시집으로 낯선 시인과 제대로 인연을 맺었다.

 

 

*하늘은 이전부터 텅 비워졌고

생은 거리를 떠돌던 가난한 청춘을 욕보였다

노비 시인의 외로움이 이곳에도 와 있지 않을까 싶어

하찮은 붓놀림이라도 흉내를 내볼 참이었으나

 

*시/ 누각(樓閣)/ 일부

 

 

*나도 너처럼 백주대낮 취기로 활보하던 거리가 있었고

빛나고 어여쁜 사랑도 꽃피웠을 청춘이 있었는데

(.....)

목숨과도 같은 것일수록

집착을 버려야 그만큼 비워지는 것인데

소중한 것이 차지한 마음의 용량이 너무 많았다

 

*시/ 조문(弔問)/ 일부

 

 

어려운 어휘나 현란한 문학적 수사 없이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쉽게 읽히면서 잔잔한 울림이 전달되는 시가 대부분이다. 오랜 시적 내공에서 오는 명징한 문장력이 이 시인의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그냥 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예리한 삶의 통찰력이 서늘하게 가슴에 박힌다. 굳이 처음부터 읽지 않고 어느 부분을 펼쳐 읽어도 부담이 없다. 시집 한 권에 인생의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다고나 할까. 오래 옆에 두고 읽을 만한 좋은 시집이다.

 

 

나의 시 - 최규환 

 

선혈(鮮血)이 고인 손가락 끝에 소독약을 바르다가
스쳐간 사람이 남긴 공백과 마주할 때
저녁상을 물리고 난 후의 적막이라 해도 좋을까
잦은 선잠에 밤이 깊은 줄도 몰랐던 몸부림이라 해도 무관하고
지나간 청춘의 무수한 맹목 앞에 처절해지다가
얼마나 많은 눈물이 고여 있을까
겨울 강가를 드는 새떼의 귀향처럼
별거 아니라는 호접몽(胡蝶夢)에 이르는 것도 그닥 나쁘지 않겠고
선홍빛 그리움으로 마지막을 준비하듯
그렇게 유고의 시 한 묶음 머리맡에 두는 것인데
남아 있는 생이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세상보다 길어
당분간 비 내리는 새벽에 나와 비에 젖는 게 좋아
안타까운 꽃말 하나 숨죽여 떠돌고 있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