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줄 映

휴가 - 이란희

마루안 2021. 12. 21. 22:48

 

 

늘 시간에 쫓기며 살기에 시간 알기를 금쪽으로 여기는 내가 이 영화는 두 번을 봤다. 포스터와 제목만 보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했던 광고 문구처럼 고상한 휴가를 생각하기 쉽지만 영화 속 휴가는 그렇지 않다.

 

 

 

 

20년 동안 일한 가구회사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부당해고라며 천막 농성을 했다. 그러기를 5년이다. 법정까지 간 소송에서 회사의 해고는 정당했다는 최종 판결을 받는다. 그동안의 고생이 물거품이 될 것인가. 노동자들은 점점 지쳐간다.

 

이 영화에는 밥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100만 구독자를 자랑하는 유튜브 먹방에서 먹는 음식과는 다르다. 먹방에서 먹는 음식은 노동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 영화에 나오는 밥은 거룩하다.

 

노동의 댓가로 산 쌀과 야채로 만든 밥을 굳은 살이 박힌 손으로 먹는 밥이야말로 진짜 밥이다. 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돼지고기 들어간 김치찌개로 고봉밥을 먹는 노동자를 보면 거룩하다. 그들은 음식을 남기지 않는다. 그들이 싹싹 비운 그릇을 볼 때 얼마나 경건해지던가.

 

영화를 두 번째로 보면서 유독 밥 먹는 장면을 눈여겨 봤다. 누가 그랬던가. 밥이 하늘이라고,, 이 영화에 나오는 밥 먹는 장면을 따라 가면서 영화 본 후기를 기록해본다. 영화 보는 내내 깊은 공감과 함께 부끄러웠다. 밥과 노동이 뭔지를 알게 하는 좋은 영화다.

 

사측의 부당해고에 맞서 전단지를 나눠주며 천막을 치고 거리에서 투쟁한 5년, 그 동안의 고생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손을 들어준 판결문에 절망한다. 재복(이봉하)은 투쟁을 잠시 쉬자며 열흘 간의 휴가를 받아 집으로 간다.

 

재복은 두 딸과 반지하에 산다. 복직 투쟁을 하느라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집이 엉망이다. 중학생이던 큰 딸은 고3이 되었고 초등학생이던 작은 딸은 중학생이다. 싱크대, 냉장고 등 곳곳을 청소하고 나니 큰 딸이 돌아온다. 같이 밥 먹자는 아빠의 제안에도 큰 딸은 안 먹는다고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오랜 만에 먹는 집밥은 혼자다.

 

큰 딸은 수시에 합격했다며 예치금으로 40만 원이 필요하단다. 알았다고 대답하는 재복의 목소리는 힘이 없다. 엄마 없이 잘 자라준 둘째 딸과 어떻게든 말을 섞어보려고 하지만 사춘기 딸은 스마트폰만 들여다 본다. 패딩을 입고 싶어하는 것을 안 재복은 엄청난 가격에 차마 사주겠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친구에게 돈 빌리러 갔다가 1주일 만 일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수제 가구 공장이다. 젊은 직원은 점심을 먹으러 가고 재복 혼자 작업장에서 점심을 먹는다. 젊은 직원이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이래야 편의점에 먹는 컵라면이다.

 

재복은 다음날 2인 분의 점심을 싸온다. 소시지 볶음을 잘 먹는 젊은 직원을 보니 재복은 흐뭇하다.

 

젊은 직원이 회사에서 다쳤다. 깁스를 해서 당분간 일을 못할 처지다. 걱정 돼서 찾아가니 보일러가 고장나 냉방에서 혼자 살고 있다. 텅빈 냉장고를 보고 한숨을 쉬며 부모님은 어디 사냐고 재복이 묻는다. 청년은 원래 부모가 없단다. 라면을 나눠 먹으며 재복은 젊은 친구의 삶이 안쓰럽기만 하다.

 

다음날 보일러를 고쳐주고 냉장고에 음식까지 채워주는 재복이다. 그리고 젊은 친구가 병원비를 냈다는 말에 산재 신청을 하면 치료비를 회사에서 전액 부담한다고 알려준다. 산재 신청서까지 내밀며 권하지만 젊은 친구는 회사와 불편해지기 싫다고 단호히 사양한다.

 

재복은 1주일 간 일한 돈으로 큰 딸의 대학 예치금도 마련했고, 작은 딸에게 패딩도 사준다. 간만에 가족이 밥상에 앉았다. 모처럼 휴가를 얻어 아빠 노릇을 한 재복이지만 내일이면 다시 투쟁하기 위해 농성 천막으로 돌아가야 한다.

 

큰 딸은 대학을 다니기 위해 곧 다른 도시로 가야 한다. 큰 딸은 혼자 남을 중학생 동생 때문이라도 이제 그만 두고 가정을 돌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항의한다. 가지 말라는 큰 딸의 만류에 재복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설득한다.

 

과연 재복은 두 딸을 설득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투쟁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열 권의 자기개발서나 힐링서보다 이 영화 한 편이 훨씬 의미 있고 울림이 크다.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세줄 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 박동훈  (0) 2022.03.30
원 세컨드 - 장이모  (0) 2022.02.10
국도극장 - 전지희  (0) 2021.12.15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 이태겸  (0) 2021.12.05
갈매기 - 김미조  (0) 202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