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의식 - 김윤환
태초에 세족식은 없었다
사람이 만든 거룩함이란
발바닥에 찍힌 생애의 지도가
흐물흐물 풀어지는
쓸쓸한 주문(呪文) 같은 것
확인되지 않는 청결의 율법
발보다 깨끗한 손이 아니라면
타인의 발을 씻는 일은
언제나 절벽의 의식
노아의 홍수 이래
무균의 샘은 없었다
정화수에 비친 제사장의 얼굴
그 눈에 티끌은 어찌하랴
새벽을 창조한 신이
사람의 발을 씻는 날
한번만 허용되는 그 위험한 의식에서
나는 내 발에 묻은 지도를
아프게 아프게 떼고 있었네
발을 씻는다는 것은
껍질을 벗겨낸다는 것
발등에 떨어진 하늘을 건진다는 것
발목을 떼어 하늘로 보낸다는 것
*시집/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모악
주일서정(主日抒情) - 김윤환
저기 휘청이며 오는 교인들의 날숨소리를 주워 담는 예배당 계단
날마다 외롭거나 상처입거나 불안한 사람들의 익숙한 들숨을
주일마다 들어주는 벽에 걸린 예수상
그 위 어디쯤 반쯤 깨진 창문 사이로 들어오던 스산한 바람 소리
장의자마다 낙엽이 쌓이고
성경위에는 말라붙은 나비들이 먼저처럼 폴락거리고
마침내 의식 없는 입례송이 흐를 무렵
구두 대신 슬리퍼를 신은 나는
덜 깬 태양처럼 어스름 웃고는 강대상에 올라가지
오늘따라 예배당이 참 어둡다고 생각할 무렵
맨 뒤켠 어디쯤 남루한 청년 하나
물끄러미 손수건을 만지고 있네
먼 길을 돌아온 나는
순간 예배당의 불을 끄고 싶었네
# 김윤환 시인은 1963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89년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그릇에 대한 기억>, <까티뿌난에서 만난 예수>, <이름의 풍장>,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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