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일도 열심히 하고 엄청 착했다 - 박지웅

마루안 2021. 11. 21. 19:45

 

 

일도 열심히 하고 엄청 착했다 - 박지웅

 

 

척은 이웃집에 살지만 이웃인 척은 안 했어요

친절과 파괴의 어원은 같아요 요즘은 이웃으로 살지요

 

척이 방문을 열면 입을 벌리고 나는 빙그르 돌아요

나더러 악어 같대요, 물론 아니죠

침대가 내 구역일 뿐이죠

여기에서는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거든요

 

밤은 내 밥벌이예요, 나는 여권도 없는 스트립 걸

홀딱 벗고 들어갈까요? 사랑이라는 세계 나는 잘 몰라

먼 데를 바라보는 사람은 착하거나 외로워요

인간은 모두 굶주림에서 출발했어요

내가 반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가 데리고 온 거짓말

 

고마워요, 사랑해요

그 말을 들었으니 내 귀는 충분히 잘 살았어요

 

가을이 등을 돌릴 때 첫눈은 내려요

생년월일이 없는 몸통을 우리는 눈사람이라고 불러요

나는 밤마다 눈사람이 되는 거죠

나에게 오세요, 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줄게요

 

딱딱하건 흐물거리건 형체는 중요하지 않아요

풍경과 역할이 바뀔 뿐 악의 질량은 변하지 않아요

일도 열심히 하고 엄청 착한 이웃이며

낯설어도 부끄러워도 마세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때라야 정확히 잴 수 있어요

혼자가 되면 내 저울 위에 올라와

영혼에 실린 악의 무게를 달아보세요

 

 

*시집/ 나비가면/ 문학동네

 

 

 

 

 

 

노력 - 박지웅

 

 

망하기로 작정한 걸까 상호가 깡통인생이다

 

계세요, 불러도 답이 없다

주인은 정말 깡통이라도 된 걸까

 

깡통화분에 꽃을 심고 깡통TV에 깡통전세에

깡통으로 먹고살다

어엿하게 깡통으로 일가를 이루었으니

정녕 깡통의 달인이시다

 

입구에서부터 쌓인 공든 깡통탑들

깡통의 절벽에 흥미로운 그분이 서 있으리라

 

깡통등불을 따라 깡통의 산을 오른다

발 디딜 때마다 꺼지고 찌그러지는 길

우물쭈물 핀 진달래까지 온통 깡통이다

 

깡통 속은 검다 탄광처럼 깊은 곳에

떠 있는 황도 같은 달

주렁주렁 양철깡통들을 매달고 허수아비 하나

끈질기게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