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 김용태 시집

마루안 2021. 11. 18. 22:32

 

 

 

요 근래 우연히 선택한 시집에 풍덩 빠졌다. 제목은 다소 낯설고 어렵지만 좋은 시로 가득하다. 갈수록 시가 자극적이거나 달달해져서 겉만 화려하고 내용물이 부실한 시집이 많은데 이 시집은 낯선 포장지에 비해 내용물이 영양가 만점이다.

 

이름 없는 시인의 첫 시집이 깊은 울림을 준다. 누굴까. 하늘의 별만큼 많기도 한 시인 중에 김용태라는 사람은 이 시집으로 처음 듣는다. 내가 시를 열심히 읽는 편이지만 시인들 만큼 정보가 있겠는가.

 

문예지를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것도 아니고 시를 써 본 적 없기에 지인들과 시에 관한 대화는 더욱 없다.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 틈틈히 시집 코너에서 까다롭게 고른 시집이다. 그게 내가 시인을 알아가는 최선의 방법이다.

 

파란만장은 아니어도 파란백장은 겪었기 때문일까. 나도 이제 연식이 반 백년을 넘어서고 보니 시를 읽으면 어느 정도 시인의 정체성을 감지할 수 있다. 곰에게 재주를 부리게 하거나 기계를 돌려 생산하는 것이 아닌 삶에서 시가 나오기에 하는 말이다.

 

김용태의 시를 읽으면 잘 익은 과실주 향기가 난다. 너무 독하거나 밍밍해 넘기기에 급급한 술이 아닌 입안에 오래 머금고 굴리다 목에 넘기기 딱 좋은 돗수다. 인적 없는 벼랑길에 핀 들꽃 향기는 또 어떤가.

 

 

*어려부터 겁이 많아
울 밖 화장실 가는 것을 겁내하던 모습이 밟힌다며,
삭정이 같은 손 뻗어 극진히 등을 달았다
이젠 그만 죽어,
삼백 예순 날 하루 가슴에서 비워낸 적 없는
새끼를 만나고 싶다고
산새 울음 겹으로 쌓이는 산길 이십 리
모진 명줄처럼 늘어져 있는 밤길 더듬어 울고 갈,

허물어져 떠내려 갈 일만 남은

 

*시/ 영가등 아래/ 일부

 

 

시집을 들출 때마다 이 시를 읽는다. 조금씩 시에 취하면 눈에 습기가 찬다. 누가 권하거나 분위기에 휩쓸려 생긴 공감이 아닌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난 공감이다. 스펀지가 물기를 머금듯 시집 끝무렵에 가면 시인의 시심에 동화되어 창밖을 오래 바라보게 된다.

 

김용태는 앞을 보는 시보다 뒤를 돌아본 시가 대부분이다. 시인도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많았기 때문일까. 유독 부모님에 대한 회상이 도드라진다. 부모님의 살을 파먹은 후 그 자양분으로 시심을 길렀으니 오죽 하겠는가.

 

 

*살다 보면 때로는 잊는 것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때가 있나니
하물며 그것이 사랑의 일이라면,
사랑도 더러는 죄를 짓는 일이거니

 

*시/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부문

 

 

표제시인 이 시도 인상적이다. 지금은 사라진 반치음과 여린히읗에 갇혔기 때문일까. 잊어야만 했던 뒤늦은 사랑도 이토록 애틋할 수 있는 것이다. 이밖에 시집에는 코로나 시대에 정서적으로 지친 마음을 정화시켜 줄 좋은 시들이 많다.

 

해설을 쓴 평론가는 김용태의 시가 불교적이라 했지만 시를 이해하는데 종교적 색채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녹차를 마시든 커피를 마시든 50대 이후라면 이 시집이 더욱 다가올 것이다. 겨울로 떠날 채비를 하는 늦가을과 잘 어울리는 좋은 시집이다.

 

 

귀천(歸天) - 김용태

 

섰다판이 끝나자

짝발의 구두를 끌며

마지막 조문객마저 돌아가

통곡도 잦아드는

상갓집 처마 밑

노오란 알전구 위에로

설핏 눈발이 치다,

이내 송이 눈이 내려

 

무사히 왔다고

이제

또 하나의 별이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