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꽃 - 임경남
사막을 건너왔어요 모래바람을 타고
내가 하는 말은 하도 서걱거려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일 년에 한두 번 온다는 비를 기다린 적도 있지만
뿌리를 내리는 대신 떠도는 법을 익혔지요
한 번도 젖을 물린 적 없는 내 몸은 종이꽃
헛물관을 타고나는 바람에
푸른 잎맥만 무성했어요
건조증이 심한 날은 온몸이 가려워
밤새도록 비듬을 긁어모아 일기를 쓰기도 했는데
문장마다 잔물결이 일어 쉬이 읽어낼 수가 없었어요
여전히 달(月)마다 꽃잎 청구서는 날아들고요
내 몸은 바람을 찢고 온 건기에 시달렸어요
사막에서도 꽃이 피네요
외로움도 간이 배어 세상의 안부 쪽으로 귀를 기울이면
저만치
잘 다듬은 눈물이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던 걸요
*시집/ 기압골의 서쪽은 맑거나 맛있거나/ 북인
능소화 흘러내리다 - 임경남
담을 넘은 능소화가 비에 젖는다
먹구름이 골목을 가득 채우자
소나기는 온통 주홍이다
병원은 내게 마지막 말을 털어내라고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낀 건 절박할 때 쓰기 위함인가
꽃의 귀에다 사랑한다는 말을 보냈으나
갈 곳을 찾지 못한 말은 흘러내렸다
더위도 초록도 흘러내리기 쉬운 계절
땅바닥에 흥건한 능소화는 만발한 죽음이다
활짝 피었다가 지고 있는 박월순 여사
이승의 담벼락에 손을 떼고 지금 어디로 떨어질지 궁리 중이다
첫째 딸 낳고 둘째 딸 낳고 셋째 딸 낳고 넷째 딸 낳고
마지막으로 낳은 죽음이 난산이다
젖은 비가 서성거리는 오후
슬픔을 독점한 여름이 붉게 익어가고 있다
눈물도 흘러내려야 비로소 눈물인데
능소화, 헐거워진 공중을 잡고 째깍째깍 시간을 재고 있다
# 임경남 시인은 1965년 경북 영덕 출생으로 2005년 <문학예술>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기압골의 서쪽은 맑거나 맛있거나>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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