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종이꽃 - 임경남

마루안 2021. 10. 26. 22:05

 

 

종이꽃 - 임경남

 

 

사막을 건너왔어요 모래바람을 타고

내가 하는 말은 하도 서걱거려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일 년에 한두 번 온다는 비를 기다린 적도 있지만

뿌리를 내리는 대신 떠도는 법을 익혔지요

한 번도 젖을 물린 적 없는 내 몸은 종이꽃

헛물관을 타고나는 바람에

푸른 잎맥만 무성했어요

건조증이 심한 날은 온몸이 가려워

밤새도록 비듬을 긁어모아 일기를 쓰기도 했는데

문장마다 잔물결이 일어 쉬이 읽어낼 수가 없었어요

여전히 달(月)마다 꽃잎 청구서는 날아들고요

내 몸은 바람을 찢고 온 건기에 시달렸어요

 

사막에서도 꽃이 피네요

외로움도 간이 배어 세상의 안부 쪽으로 귀를 기울이면

저만치

잘 다듬은 눈물이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던 걸요

 

 

*시집/ 기압골의 서쪽은 맑거나 맛있거나/ 북인

 

 

 

 

 

 

능소화 흘러내리다 - 임경남

 

 

담을 넘은 능소화가 비에 젖는다

먹구름이 골목을 가득 채우자

소나기는 온통 주홍이다

병원은 내게 마지막 말을 털어내라고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낀 건 절박할 때 쓰기 위함인가

 

꽃의 귀에다 사랑한다는 말을 보냈으나

갈 곳을 찾지 못한 말은 흘러내렸다

더위도 초록도 흘러내리기 쉬운 계절

땅바닥에 흥건한 능소화는 만발한 죽음이다

 

활짝 피었다가 지고 있는 박월순 여사

이승의 담벼락에 손을 떼고 지금 어디로 떨어질지 궁리 중이다

첫째 딸 낳고 둘째 딸 낳고 셋째 딸 낳고 넷째 딸 낳고

마지막으로 낳은 죽음이 난산이다

 

젖은 비가 서성거리는 오후

슬픔을 독점한 여름이 붉게 익어가고 있다

눈물도 흘러내려야 비로소 눈물인데

능소화, 헐거워진 공중을 잡고 째깍째깍 시간을 재고 있다

 

 

 

 

# 임경남 시인은 1965년 경북 영덕 출생으로 2005년 <문학예술>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기압골의 서쪽은 맑거나 맛있거나>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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