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숨은 운명 - 천수호

마루안 2021. 10. 23. 22:15

 

 

숨은 운명 - 천수호


아무리 더 가지려 해도
창(窓)은 단호하게 "거기까지!" 네 음절의 칼날로 내리친다
칼끝과 칼끝이 부딪치며 멈춘
냉철한 선(線)의 세계

더 가질 수 있는 날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니까

틀이 깨질 때까지 수건을 절반으로 접는 연습을 했다
저곳은 유연해
허리를 쉽게 휘는 것들은 창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아

'묘안'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눈동자가 봉분 같은 고양이가
물어뜯을 것이 있는 쪽으로 허리를 휘는 장면처럼
매미 소리가 내 몸을 아무 곳이나 뚫으면서 애벌레 걸음으로 왔다가 간다

내게 저렇게 왔다 가는 것들
창을 건드리지 않으면 도저히 담장을 넘을 수 없는 것들

창을 내다보다가
순간이라는 말이
화면을 닫았다가 열면서 검은 새떼를 쫓는 장면을 목격한다

오늘의 창은 여기까지!
선을 자르는 칼날 연습중

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진 몇 마리 하루살이의 율동으로
맨발은 더 걸어나갈 수가 없다

창을 깨고 맨발이 피를 흘린다

아무리 더 가지지 않으려 해도 운명은 숨어서
바깥 날씨를 마음껏 저장하고 있다


*시집/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문학동네

 

 

 

 

 

와서 가져가라 - 천수호


이 카페에서 바라보는 은행잎은 좀처럼 대열을 흐트리지 않는다
바람이 다녀갔다는 전갈만 칼날처럼 목에 닿은 듯 파르르

낮에 날던 참새떼가 모처럼 높게 앉았다 간다

이층 카페의 누군가가 따뜻한 머그잔을 만지작거린다

이른 서리를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낱낱의 은행잎들

어쩔 수 없이 왔다가 미련 없이 가는 거라고
한 죽음을 애도하던 낮은 위로의 목소리가
휘파람처럼 지나갔다

칼날 눈빛으로 자주 은행잎 방패를 찔러보던
저 자리의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따라가고 싶다고 말하려다가 배짱을 부린다

여기 와서 가져가라

바람도 멈추고 은행잎도 고요해진다

 

 

 

# 천수호 시인은 1964년 경북 경산 출생으로 명지대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주 붉은 현기증>, <우울은 허밍>,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징검다리 버튼 - 김영진  (0) 2021.10.26
종이꽃 - 임경남  (0) 2021.10.26
내 안에 머물던 새 - 박남원  (0) 2021.10.23
유령은하 - 윤의섭  (0) 2021.10.22
가을비의 그대들 - 우대식  (0) 2021.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