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가짜 남편 만들기 - 강명관

마루안 2021. 10. 4. 19:39

 

 

 

나는 이런 류의 역사책을 좋아한다. 소설은 잘 안 읽지만 실존했던 사건을 지은이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책 말이다. 요즘 언론에 자주 나오는 검찰 사주라는 엄청난 사건도 언론이나 정치적 시각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지 않던가.

 

검사 관련 책까지 낸 한 국회의원의 교묘한 거짓말이 마치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본질과 초점이 엉뚱한 곳으로 향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도 역사서로 분류할 수 있지만 그 역사 또한 당대에 내가 살았더라도 어떤 것이 진실인지를 가늠하기 쉽지 않았을 듯하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책에 나오는 사건을 이번에 알았다. 강명관 선생의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더 늦게 알았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을 때도 우리 역사에 비슷한 사건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내가 이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려간 것도 그 때문이다. 강명관 선생의 논리적이면서 문학적인 문장도 가독성을 높인다.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을 온전히 감상한 기분이다. 흥미진진한 사건에다 저자 특유의 글발이 제대로 발휘되었다고 할까.

 

제목에서 보듯 가짜 남편 만들기는 가출한 남편 때문에 청상과부처럼 살아야만 했던 한 여인의 생존전략이다. 조선 중기 유유(柳游)라는 남자는 양반 가문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현감, 조부는 사간, 증조부는 승지를 지냈으니 재산도 넉넉하고 노비를 여럿 부리는 가문이다.

 

장남이 일찍 죽자 둘째인 유유가 장남 역할을 하고 있다. 결혼하고 3년이 지나도 자식이 없자 유유는 가출을 한다. 아버지도 부인도 그가 미쳐서 집을 나갔다고 한다. 강명관 선생은 여기서 유유가 동성애자였을 것으로 진단하는데 이 점은 나도 동의한다.

 

유유는 여자에게 성적 매력을 못 느끼거나 발기가 되지 않는 성불구자였을 것이다. 당시 사대부가에서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을 가문의 수치로 여겼을 것이다. 며느리의 사연을 듣고 시아버지가 내린 결론은 아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제 이 가문은 셋째 아들 유연이 장남 역을 하고 있다. 유교 사회인 당시 제사를 모시는 아들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여 제사를 모신다. 몇 년 후, 뜬금없이 자신이 유유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동생 유연은 그 남자가 미심쩍다. 아버지는 죽고 없다. 아무리 자기 집안 대소사를 쫙 꿰고 있지만 그 사람은 형이 아니다. 유연은 노비들과 함께 그를 묶어 대구 감영에 신고한다. 진짜 형이 아니라는 것을 유연은 이렇게 말한다.

 

형은 신체가 왜소하나 이 사람은 장대합니다. 또 형은 수염이 없는데 이 사람은 수염이 수북합니다. 그리고 형은 목소리가 여자처럼 가는데 이 남자는 우렁찹니다. 가짜 유유는 타지에서 너무 고생해서 이렇게 변한 것이라며 결혼 첫날밤의 일과 아내의 신체 특정한 곳에 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유유의 아내 백씨는 채응규의 주장이 맞다면서 남편으로 인정한다. 그러다 며칠 후 가짜가 들통날까 두려웠던지 채응규가 도망을 친다. 이 사건은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튄다. 시동생 유연이 형을 살해하고 시신을 강물에 버렸다며 형수 백씨가 고발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부모를 죽이거나 형을 살해한 죄목은 사형이다. 유연은 모진 고문 끝에 형을 죽였다는 자백을 하고 노비 두 명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실로 억울한 죽음이다. 사건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유연이 사형을 당한 지 15년 후, 진짜 유유가 돌아온 것이다. 이제서야 아들을 사칭하다 달아난 채응규를 체포해 사건 전모가 드러나면서 유연이 억울하게 처형되었음이 밝혀진다. 채응규는 압송 중에 자결을 하고 그의 첩 춘수는 유유의 매형 이지가 모든 것을 꾸민 것이라 자백한다.

 

이지는 가출한 유유 누나의 남편이다. 처갓집 재산을 노리고 채응규를 가짜 유유로 꾸몄다는 것이다. 이지는 모진 고문에도 결백을 주장하다가 고문 중에 사망을 한다. 채응규의 아내 춘수도 처형을 당하면서 이 사건으로 도합 6명이 목숨을 잃는다.

 

강명관 선생은 합리적이지 못한 조선의 사법제도를 지적하며 죽지 않아도 될 목숨을 안타까워한다. 모든 사건의 발단은 가정을 포기하고 집을 나간 유유 때문이다. 조선 사회에는 한 번 결혼한 여자는 재혼을 할 수 없었다. 결혼 며칠 만에 남자가 죽었더라도 평생 수절해야 한다.

 

하물며 동성애자 아들을 둔 양반가에서 어떻게 그걸 드러낼 수 있겠는가. 여섯 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에도 불구하고 유유의 아내 백씨는 어떤 조사도 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갔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아는 한 여인의 생존전략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