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通

현대시 8월호에서 발견한 시

마루안 2021. 8. 17. 21:48

 

 

 

올 여름은 빨리 시원해져서 좋다. 유독 무더위가 일찍 찾아와 이 긴 여름을 어찌 견디나 했는데 다행히 며칠 새 아침 저녁으로 공기가 서늘해졌다. 코로나로 인해 이 더위에 마스크 쓰는 것이 고역이었는데 요즘은 한결 나아졌다.

 

현대시 8월호에 눈에 띄는 시가 보인다. 최백규 시 두 편이다. 가수 최백호는 알아도 최백규 시인은 처음이다. 시를 읽고 정보를 찾아 보니 꽤 젊은 시인이다. 최백규는 1992년 대구 출생으로 2014년에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동인 시집을 내긴 했으나 아직 개인 시집은 없는 모양이다. 화가가 한두 작품 출품한 그룹전만 열었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개인전을 가진 적 없는 것과 같다.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창창한 나이인데 첫 시집이 조금 늦어진들 어떠리. 창궐하는 전염병으로 정서가 엉망진창인 시절이어서일까. 읽을수록 공감이 가는 시 두 편을 모두 올린다. 기대하며 지켜볼 만한 시인이다.

 

 

 

장마철 - 최백규

 

 

정학과 실직을 동시에 치르고도 여름은 온다

 

터진 수도관에서 녹물이 흐르고 장롱 뒤 도배된 신문지로 곰팡이가 번지다 못해 썩어들어간다 기름때 찌든 환풍기를 아무리 틀어도 습기가 자욱하다

 

깨진 유리병 옆에 버려둔 감자마저 싹을 흘리고 있다 벌겋게 익은 등근육 위로 욕설을 할퀴고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다가

마주 보던 사람이 떠올라서

 

밀린 급여라도 받기 위해 진종일 공사판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전신주에 기대앉아 신발 밑창으로 흙바닥의 침을 짓이기고 불씨 죽은 드럼통이나 해진 목장갑만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도 한다 숨이 차도록

 

구름이 낮다

 

신입생 시절 교정에 벽보를 바르던 선배들은 하나같이 폭우를 맞은 표정이었다 화난 얼굴로 외치는 시대와 사랑이 고깃집이나 당구장에 널려 있었고 나는 무단 횡단할 때보다 용기가 없었다

후미진 신록 아래 돌아가는 전축에서 이 지상에 없는 청년이 무심히 젊음을 노래하는데 장송곡을 닮은 우리에게

 

여름 바람이 불어와 여름을 실어 가고 있었다

 

이제 홀로 뒷골목에 남아 뜨거운 눈물을 훔치며

왜 비가 그쳐도 우리의 장마철은 도무지 끝나지 않는가 중얼거리며

 

멍하니 올려다본다

 

빚을 남긴 동창의 부음을 들은 것처럼, 낙향한 주검을 눕혀놓고 어색하게 염을 지키던 친구들처럼, 흰 봉투와 갈라 터진 입술의 피와 편육 그리고 아스팔트 위 꺼뜨린 담뱃재처럼

 

연풍에도 쉬이 스러지는 밤 그늘이었다

 

너무 오래 비가 왔다

 

 

 

 

돌의 흉곽 - 최백규

 

 

호스피스 병동 한구석에 누운 그는 강바닥에 묻힌 돌이었다

병실마다 선산이었다

 

지금 가슴을 열지 않으면 암세포가 파고든다지만 수술비는 삼촌이 도박으로 탕진한 지 오래였다

 

사채업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하자 그는 자루 안에서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웅크렸다 여생 동안 돈에 묶여 물속으로 유기된 셈이다

 

언젠가 나는 물 바깥에서 배를 뒤집은 돌과 눈을 맞추며 앉아 있었는데

 

어느 날 일터에서 귀가한 그는 가족에게 바람을 쐬러 계곡으로 떠나자 했다 주말 저녁이라 차들이 밀려 나와 아주 어두워서야 황량한 저수지라도 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맘때가 돌아오면 수면에 돌을 던지고 환하게 번져 나가던 그의 웃음이 어른댄다

 

쓰러진 후부터 그는 매일 관을 내리듯 떨어진 꽃만 주웠다 어릴 적 어머니와 지키던 고물상 터로 돌아온 듯이 천막을 견디는 흉곽이 너울거렸다

 

나는 강바닥으로 가라앉으며

그의 심장을 머언 바다로 밀어주고 싶었다

 

 

*현대시/ 2021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