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 윤의섭 시집

마루안 2021. 7. 26. 19:20

 

 

 

윤의섭 시인이 소문도 없이 시집을 냈다. 서점에 갈 때마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는 것처럼 시집 코너를 들른다. 요즘은 보통 토요일이나 일요일 오전이 그런 날인데 사람이 많지 않아 여유을 부리며 출판 동향을 탐색할 수 있어서 좋다.

 

언제나 나의 관심은 메이저 출판사보다 무명 출판사 시집이 먼저다. 그런 시집일수록 눈에 띄는 곳이 아닌 모퉁이 아니면 맨 아래 칸이다. 여행에서도 걸어야만 보이는 풍경이 있듯이 시집 코너에서도 쭈그리고 앉아야 보이는 시집이 있다.

 

어라, 이 시인이 시집을 냈네? 이 시인도 비교적 시집 내는 주기가 4년 정도로 규칙적이었는데 이번 시집은 조금 주기가 당겨졌다. 단순한 디자인의 소박한 표지가 마음에 든다. 사람도 반가우면 손부터 잡듯이 나는 반가운 시집을 만나면 표지를 쓰다듬는 버릇이 있다.

 

이 시집도 펼치기 전에 표지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여전히 좋은 시들로 가득하다. 언제가부터 그의 시에 중독이 되어 내가 들춰보지도 않고 선택하는 시인 중 한 명이다. 이번까지 내가 읽은 그이 시집은 모두 일곱 권, 좋아 하는 모둠전처럼 제목을 펼쳐 놓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혼잣말이든 아님 사람들 앞이든 낭송하기에 좋은 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들뜬 마음이거나 혹은 욕망에 사로잡힌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눈과 입과 귀에 착 달라 붙는 시다. 아무래도 나는 이 시인에게 제대로 꽂혔지 싶다.

 

 

그 후 - 윤의섭

오늘 아침은 깨진 조각 나는 파편에서 눈을 떴다
편린의 날이란 떨어진 꽃잎처럼 빠르게 시드는 것이다
창문은 빛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기억은 죽었다
이 조각은 완벽한 난파선이거나 소행성이다 흘러갈 뿐
달력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어떤 약병에 적힌 유효기간은 알 수 없는 연대였다
누가 부르는 줄 알았는데 바람 소리였다 나는 외로워진 것이다
아침을 맞이하는 나의 형식은 장례식과 같다
떠나보내고 산 자의 시간을 살아가는 제의
여전히 흐리다 나는 태양을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이 조각은 장구한 상실이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마모와 퇴화로 나는 희미해진다
밀린 빨래를 하고 아침밥은 거르고
외출을 시도해야지
거리는 익숙할 것이고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넬 수도 있겠지
오늘 아침이 처음은 아닌 것도 같고

 

 

내가 이 시집을 깊이 있고 단단하게 평가할 능력은 없다. 그래도 눈에 척척 감겨오는 감동은 주체할 수 없어서 어떤 문장으로 설명을 할까 난감하던 차에 시집 뒷표지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문장을 발견했다.

 

이래서 시집은 속지, 겉지, 날개까지 쭈쭈바 빨아 먹듯 샅샅이 찾아 읽어야 하는 법이다. 이 시집을 가장 알맞게 설명한 그 문장을 옮긴다. 추천 여부를 떠나 오래 오래 음미하며 읽을 만한 좋은 시집이다.

 

 

*그의 시들은 무수한 몽환을 통과하며 기억과 정신을 유영한다. 시인은 특유의 단단하고도 섬세한 시어들로 인간의 가장 어둡고도 환한 구석을 향한다. 윤의섭 시인의 시는 세계가 꾸는 꿈에 대한 해몽이며 번역할 수 없는 이계(異界)에 대한 예감이다. 비몽과 사몽 사이를 오가는 꿈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깃드는 것일까. 이 시집은 영원히 이어지는 꿈에 바치는 길고 아름다운 제문이다. *이혜미 시인의 추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