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아득한 바다, 한때 - 이자규 시집

마루안 2021. 7. 15. 19:45

 

 

 

최근 오래 눈길이 가는 시집 하나를 만나 행복했다. 지긋지긋한 코로나에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에 지친 시름을 달래준 시집이라고 할까. 미사여구로 치장한 마냥 밝고 화창한 시들은 아니지만 싯구를 곱씹으며 반복해서 읽는 맛이 쏠쏠하다.

 

다소 흔한 듯한 <아득한 바다, 한때>라는 제목도 금방 눈에 들어오지만 시집 디자인 또한 눈길을 끈다. 짙은 노을이 진 아득한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표지가 시 내용과도 잘 어울린다. 이자규 시인은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다.

 

<우물치는 여자>와 <돌과 나비>라는 두 권의 시집에서 자신 만의 독특한 시적 내공을 선보였던 여성 시인이다. 이전에 그리 관심 있게 읽지 않았으나 이번 시집에서 제대로 가슴을 치면서 긴 울림을 준다.

 

좋은 시는 읽고 나서 마음 속에만 담고 있기엔 미련이 남는다. 다람쥐는 부지런히 먹이를 구해 숨겨 두는 습관이 있다는데 나 또한 기억 창고처럼 훗날 꺼내 읽을 시곳간이 있어서 다행이다.

 

이자규 시는 조용히 낭송하기에도 좋지만 한 자 한 자, 한 줄 한 줄씩 입에 붙였다가 떼면서 타이핑하는 맛이 일품이다. 이것도 좋은 시의 한 단면 아닐까. 단박에 강렬한 맛이 느껴지지 않아도 음미하면서 제 맛을 찾을 수 있는 시이기도 하다.

 

*술 한 병의 노동과 구름과자가 자유였다

(....)

수도관 터져 폭탄 파열을 첫새벽에 홀로 감당해 보는 맛, (....) 우주로 연결된 모든 파이프의 통설이 각인되는 순간

 

*시/ 순록이 있는 창밖/ 일부

 

나는 왜 유독 이런 싯구에 오래 눈길이 가는 걸까. 막바지 인생의 허무함보다 무난히 살아낸 일생이 눈물겹게 아름답다. 병상에 누워 지난 날을 돌아볼 때 만큼 경건한 시간이 또 있을까. 회복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일수록 그 회상은 마른 물기로 가득하다.

 

이 외에도 시 한 편이 통째로 명품인 시들이 여럿인데 음미할수록 따끔함과 서늘함이 교차하며 긴 여운을 남긴다. 이런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은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을까.

 

*산재한 조산아들의 언어들 그리고 하혈 터진 온도가 천천히 먼지를 쓸고 간다 비로소 빛을 발하는 친절한 것들에 신세지고 싶은 현상

 

무릎을 세우고 젖동냥을 기다리는 낭하의 시간

 

*시/ 어둠현상학/ 일부

 

이런 시들은 유통기한이 길다. 절판된 시집이 복간되어 선 보이기도 하지만 별 공감을 못 느낄 때가 있다. 좋은 시도 다 때가 있음의 이유다. 이 시집 발문을 쓴 김상환 선생은 이자규 시를 이렇게 평한다. 

 

*이자규 시인의 시에는 "모래와 바람이 뒤섞인 마음의 오지"가 있다. 침묵의 형이상학과 도도한 고요가 있다. 생각하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피와 땀과 눈물로 점철된 생의 시인 이자규, 그녀의 깊은 내면과 견고한 시간은 이번 시집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김상환 

 

시인도 십 년 후에나 읽힐 시라고 했지만 백 년 후에 읽어도 오래도록 감동이 남을 시다. 무명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 하나가 마음을 설레게 한다. 묻혀 있기에 아까운 좋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