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트로트가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 장유정

마루안 2021. 6. 15. 19:43

 

 

 

어릴 때 누이가 즐겨 부른 탓에 트로트를 좋아한다. 트로트는 말 그대로 유행가였다. 누이도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트로트를 배웠을 것이다. 장독대에 올라가 숟가락을 마이크 삼아 이미자와 하춘화의 노래를 구슬프게 불렀다.

 

이 책은 한국 트로트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클래식에 관한 책은 많아도 대중음악을 연구한 책은 드문데 꽤 흥미롭게 읽었다. 내 혈관에 트로트 선율이 흐르고 있기에 많은 부분 공감을 하면서도 왜 하필 트로트라는 이름으로 고정이 되었을까에는 늘 불만이었다.

 

어릴 때 태풍과 함께 퍼붓는 비에 홍수가 난 적이 있다. 동네 담벼락이 무너지고 개울이 터지고 감나무가 부러지고 피해가 막심한데 마을 앞 수문은 멀쩡했다. 그때 동네 어른들 하는 말이 일정 때 왜놈들이 만든 수문이어서 이 물난리에도 끄떡없었다고 했다.

 

겉으론 일본을 왜놈이니 쪽바리니 무시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일본의 근성을 인정하는 것이 비단 이것 뿐일까.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내 생각은 한국 트로트의 기원은 일본 엔카에서 왔다. 그냥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피해 의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저자도 책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트로트는 일본 대중가요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었으나 우리식으로 순화 형성되어 토착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대중가요였던 엔카(演歌)가 초기에는 류코카(流行歌)였다가 전시 체제로 가면서 유행가란 말이 가요코쿠(歌謠曲)로 불렸다>.

 

한국에서도 트로트를 오랫동안 유행가라 불렀다. 가요곡이란 단어 또한 마찬가지다. 유행가뿐 아니라 많은 음악 용어가 일본식 표현 그대로다. 고전음악, 낭만파, 가요, 신곡, 작사, 편곡, 가곡, 야상곡, 독주, 협연, 합창 등 전부 일본 음악 용어다.

 

내 어릴 적 동네 할머니들은 트로트를 창가라 했다. 이 창가도 일본식 표현이다. 전통이라 해도 그것이 한순간에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오랜 기간 인간의 삶과 시대를 반영하면서 모방과 창작을 반복한 끝에 정착된다. 트로트도 창가, 유행가를 거쳐 정착된 단어다.

 

트로트보다 훨씬 이전에 한국인과 함께 한 판소리도 1970년대에 와서야 단어가 정착되었다. 불과 50년 전이다. 이전에는 그냥 소리, 아니면 극가, 창, 타령, 광대소리, 창극조 등으로 불렸다.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판소리라는 단어를 창작한 사람에게 감사한다.

 

이 책에도 트로트로 단어가 정착되기까지의 과정이 나오지만 왜 하필 트로트인가다. 나는 뽕짝이란 말을 좋아한다. 트로트보다는 차라리 뽕짝이 낫다. 뽕짝이 트로트를 비하한 말이라는데 그럼 트로트는 지난 100년을 한국인과 함께 했던 노래 장르로 적절한 단어인가.

 

나는 뽕짝이 트로트 정서를 가장 잘 담고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송대관의 노래 <네 박자>가 처음엔 뽕짝이었다. 주변에서 제목이 너무 천박하다며 누구도 부르지 않다가 송대관이 제목을 네 박자로 바꾸고 뽕짝이란 가사를 쿵짝으로 고쳐 불러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노래 네 박자에 나오는 쿵짝을 뽕짝으로 다시 고쳐 가사를 옮겨 본다. 뽕짝 뽕짝 뽕차자 뽕짝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네/ 한 구절 한 고비 꺾어 넘을 때 우리네 사연을 담는/ 울고 웃는 인생사 연극 같은 세상사/ 세상사 모두가 네 박자 뽕짝.

 

이 제목을 바꾸지 않고 뽕짝으로 히트를 했다면 지금쯤 트로트는 뽕짝으로 불렸을지 누가 아는가. 이제는 맘에 들지 않아도 트로트라 부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쉽다. 트로트도 언젠가부터 트롯으로 표기하고 있다.

 

어쨌든 저자의 말처럼 트로트는 이제 유행가, 유흥歌, 노동요 등으로 한국인의 정서 일부분이다. <누군가 트로트의 생명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트로트가 변신의 귀재라는 것에서 그 답을 찾을 것이다. 트로트는 그 무엇도 거부하지 않는다. 차별하지도 않는다>. 

 

지금은 사리진 풍경이지만 예전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관광버스에 캬바레풍의 뽕짝을 틀어 놓고 모두 일어나 춤을 주는 장면을 자주 봤다. 농촌 부녀회에서 매년 떠나던 꽃놀이 관광지에서 어울려 흔들 때 스피커에서는 어김없이 뽕짝이 흘러나왔다. 노래의 힘은 이렇게 질긴 것이다. 귀하게 읽은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