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족 - 석미화

마루안 2021. 5. 2. 19:45

 

 

가족 - 석미화

 

 

검은 산 아래 귀신집 살림살이라고 누가 써놓고 갔다 봄날, 귀신같은 사람들하고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졌다

 

내일 언제 떠난다고 했지

 

뜨거운 냄비를 상 위에 올려두면 문이 저절로 열리고 닫혔다 술병이 쌓인 만큼 돌아갈 길은 더 멀어졌다 바깥만 바라보는 일에 반쯤 혼이 나간 여자는 가족은 그러면 안 되지, 중얼거렸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참, 그렇지

 

비 오는 날에는 맑게 앉아서 앞으로의 거처들을 말했다 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점차 거세지는 빗소리가 들렸다

 

해야 할 말보다 하고 싶은 말만 쌓여갔다

 

검은 산에 불타는 얼굴이 겹쳐 보이고 천장에서 거미가 내려오고 밤에 보는 거미는 불길하다며 서로를 몰아세웠다

 

그래도 여기 살 만하지 비가 그치면 이만한 데가 없지 분명 누가 돌아보았는데 다시 만나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밤이면 창문에 어른거리는 것이 있었다

 

 

*시집/ 당신을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 여우난골

 

 

 

 

 

 

흰 강 - 석미화


언젠가 강바닥을 퍼내자 슬리퍼가 딸려 나왔다 왜 혼자 거기서 죽었지, 말들이 떠돌았다

아이들은 가끔 고열을 앓았다 흙마당에서 굿판이 벌어졌다 당고모는 물고 있던 칼을 강 그림자 바깥으로 던졌다 백동전을 주으러 가는 새벽

강은 매일 허옇게 변해갔다 한 번씩 서로의 몸을 엮어 물살을 거슬러 올랐다

우리는 영구차 먼지 속에서 미루나무처럼 크고 싶었다




# 석미화 시인은 1969년 경북 성주 출생으로 계명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2014년 <시인수첩> 신인상을 받았다.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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