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초록에 잠들다 - 우남정

마루안 2021. 4. 28. 19:49

 

 

초록에 잠들다 - 우남정


꽃이 들판을 온통 봄으로 물들이고 간 뒤
먼 산 뻐꾸기 울음 아슴아슴 들려온다

아직도 갈대숲에는 빈 대궁들이 서걱거린다
꽃과 씨앗 다 떠나보내고, 그들은
왜 머리채 휘어잡는 바람과 맞서 긴 겨울을 건너왔을까
취한 아비들이 정거장에서 막차를 기다리듯
휘청거리는 허리를 곧추세우며 넘어질 듯 일어서고 있는가

쭈그리고 앉아 그 어둑한 밑동을 들여다본다
젖은 발가락 끝에
송곳니처럼 솟은 두어 뼘의 어린 초록이 보인다
저 어린것들이 제 어미를 먹어치우고 있었던 것일까

낮과 밤을 넘나들며 초록이
초록이 번진다

무엇을 끌어당기는 것일까 저 해묵은 손짓은
눈물 번득이는 칼날
가슴 언저리까지 차올라
차라리 그 초록에 찔려 죽고 싶다는 뜻일까
그예 한 세대를 넘겨주는 것일까
가녀린 쭉정이들의 장엄한 배턴 터치를 본다

한낮 초록 광배에 휩싸여
희끗한 그의 머리가 갈대숲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시집/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문학의전당

 

 

 

 

 

 

부메랑 - 우남정


버린 것이 돌아온다
까맣게 잊고 싶은 것들이 펄펄 살아 돌아온다

내가 외면한 울음이
질끈 눈감고 지나쳐 간 바람이
등을 돌리고 멀어져 가던 그 저녁이
비릿한 냄새에 싸여, 차갑고 예리한 맛이 소금처럼 돋아난다

찢어진 그물 같은, 빈 페트병 같은, 망가진 부표(浮標) 같은,
버뮤다*까지 갔던 것들이 기어이 살아온다

포르말린에 수장된 시험관 표본처럼
표정과 지문이 닳아버린

어제가 돌아온다
기어이 자신의 백사장에 흰 뼈를 묻겠다고

불면의 바다가 쓰라리다


*버뮤다: 마(魔)의 삼각지대라 할 만큼 사고가 많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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