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총상화서 - 류성훈

마루안 2021. 4. 19. 19:11

 

 

총상화서 - 류성훈


봄은 한 번도 봄에 이른 적 없고
너무 가벼워
담장 어디에서도 주울 수 없는 발소리가 땡볕 아래의 줄기들을 깨운다
용서 같은 건 받는 쪽보다 하는 쪽이 나을 줄 알았어, 네가
아침을 그렇게 닮은 줄 몰랐던 나는 주전부리 하나 없는 저녁만 닮아 갔다

나무도 링거를 맞는 세상이네
그런 소리나 하면서
기약 없는 인사를 늘려 가면서

우리는 더 가벼운 곳으로
꽃잎들이 다시 하늘로

졸도한 온도계 눈금을 손금처럼 펴 보이는
네겐 모든 상처들만 유채색이었다
밀과 보리가 자라듯
우리는 무한히 자랄 줄 알았지 다르게 자란 건 죄야, 나는 너를 탓하고 너는 봄을 탓하며 젖은 잎을 주웠다

웃으면서, 웃으면서 끼워 놓은 책은 다시 펴지 말자
아무리 걸어도 마주치지 않을 계절 앞
봄,이라는 말은 더 근질근질했다

덮인 앞장을 되돌리는 꽃눈이
겹겹이 오른다


*시집/ 보이저 1호에게/ 파란출판

 

 

 

 

 

 

봄밤 - 류성훈


누구나 봄밤 하나씩은 갖고 있었지만
봄은 아무도 데리고 있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기엔 나이가 많고 별을 탓하기엔 어린 시대, 아직 추운 밤들만 먹이는 봄이 물을 끓인다 결국 재개발이 결정된 판자촌에 화재가 나고 주님의 은총으로 두 명밖에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목회 앞에서 종교와 사람이 서로를 버리던

아직도 그런 곳이 있어?

그런 곳이 있다 집이란 있을 곳이 아니듯 봄은 내게도 있을 계절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짧아지는 밤들과 유통기한 지난 평온이 생살을 저밀 때 조심성 없는 하늘이 봄을 가스불처럼 켜면 발진처럼 돋는 꽃눈들을 솎아 내면서

수없이 펼쳐진 흉터들이 모두 분홍빛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살았다

 

 


# 류성훈의 시는 눈으로 읽어도 입으로 읽으도 맛이 있다. 그러고 보면 시를 잘 쓰는 시인이 분명 있긴 있나 보다. 요즘 프로야구 중계에 빠져 사는데 연봉 많은 선수의 플레이를 보면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시를 야구 선수 몸값에 비유할 건 아니지만 이렇게 공감 가는 좋은 시에 높은 별점을 주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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