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없는 것보다 못한 - 여태천

마루안 2021. 4. 16. 19:26

 

 

없는 것보다 못한 - 여태천


어둠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주머니에 넣은 손을 어쩌지 못하고 망설일 때
하나둘씩 카드를 접기 시작했다.

마감뉴스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재수 없다.

메시지는 저 멀리서 온다.
간절하지 않은 것은 없으니
상황은 언제나 최악이다.

한 사람은 이제 걷기 시작했지만
한 사람은 지금 막 주저앉는다.

누군가를 웃게 하는
누군가를 울게 하는

언제나 몸은 피가 모자라고
그 사실은 숨길 수 없다.

만질 수 있는 따뜻한 손이 아니었다.
너무 가까이 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시집/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민음사

 

 

 

 

 

슬픔은 자란다 - 여태천


잘 자라지 않았다.
당신의 목소리는 느긋하고 나이스했지만
아침 일찍 벌레를 잡는다는 새 이야기는
좋아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밥을 먹고 나면
좁은 다락방에서 없는 사람처럼 보냈으니,

온도 차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허리를 반쯤 구부리고 위로하듯
당신이 찾았던 그 낮은 다락방에서
덜 자란 어른처럼 침묵했을 뿐,
다행스러운 건 그토록 긴 편지에서처럼
슬픔이라는 단어가 그리 싫지 않았다.

슬픔을 오래 쌓아 두면 몸이 상한다고들 했지만
그래서 잘 자라지 않는 거라고들 말했지만
한동안 그런 줄 알았지만
벌레를 잡은 새들이 제집으로 돌아갈 무렵
안개처럼 희미해지는 기분으로 해질녘을 보냈으니,

있어도 없을 것 같았던
없으면 더 궁금했던 다락방
열 번은 읽었을 백과사전을 덮으면
흐린 전등 아래서 바둑알처럼 반짝이던 글씨
친구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환히 웃는 듯한 표정으로 당신은
언제든 내려와도 좋다고 했지만

서늘했던 그 다락방을 떠날 수 없었다.
잘 자라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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