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날 수리점 - 안채영

마루안 2021. 4. 16. 19:15

 

 

봄날 수리점 - 안채영


물 담긴 고무 대야에
자전거 튜브를 넣자
자잘한 공기의 씨앗이 흘러나온다

날카로운 못 하나가 뚫어놓은 곳으로
파종되는 봄날의 공기들
바람이 새는 곳을 찾아
접착제 묻은 햇살 하나 붙여두면
다시 굴러갈 둥근 바퀴들

문득, 잠깐 멈추었던 지구가 다시 도는 듯
차르르 체인 도는 소리가 들리고
수리가 끝난 바람의 핸들을 잡고
짧은 봄날이 간다

날카로운 못 하나를 줍고 싶다
부푸는 벚꽃나무를 찔러 바람 빼면
우수수 날리며 쏟아져 날릴 흰 꽃잎들
달력을 찌르면,
생일을 찌르면 다 빠져나가고 남을
숫자 없는 생

바쁜 봄바람이 잠시 서 있고
흰 머리카락 한 올 같은 깊은 실금을 내고 있는 봄

고장 난 봄바람 몇 대 세워놓고
고무 대야에 물 담아놓고 있는 자전거 수리점
바람 빠진 몇 번의 봄을 끌고 와
수리가 끝날 때까지
쭈그려 앉아 기다리고 싶은,


*시집/ 생의 전부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오후/ 달아실

 

 

 

 



곡우 무렵 - 안채영


고로쇠수액봉투에 지난밤이 고여 불룩하다
야생차밭에 참새들이 앉았다 날아간 뒤 낮은 허공엔 새들의 푸른 혀가 가득하다

떫지 않은 고백이 있을까

씨앗에 비가 내린다는 절기, 움트는 것들이 어디 먼 곳의 기억뿐이겠는가
뜨거웠다 식혔다를 반복해 덖어도
자꾸만 바깥으로 튕겨 나오던 돌돌 말려진 혓바닥
제대로 한 번 우려내 보지 못한 관계들은 다 푸르스름하여
달아오른 헛것의 그늘에도 들지 못한다

곡우 무렵 새들이 떠난 자리마다
새의 혀들이 와글와글 끓고 있다
지나간 절기에 뱉었던 말들이 촘촘 돋아나 있는 차밭
황경(黃經)에도 들지 못한 절기가 있다
마른 잎으로 견디는 시간쯤이야
더운물 한 그릇 만나 펴진다지만
잎의 뒷면에 들었던 원행(遠行)엔 쫑긋 세운 귀가 없다

나무들의 수혈이 끝나는 곳
푸르스름한 소실점들이 길고 멀다
혀를 갖지 못한 말들이 땅속에서 우려지고 있는 시간
천천히 비워지고 있는 겨울 산에
물 끓는 소리가 졸졸 난다

늦은 발자국 소리 같은 잎이 톡톡 피는 야생 차밭, 그늘진 적요에
문 하나 틔워놓으라는 시린 당부

 

 


# 안채영 시인은 1967년 경남 진주 출생으로 201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생의 전부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오후>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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