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들짝, 봄 - 김정수
노총각 동생이 집을 나간 후부터 서울역 지하도 지나다닐 때마다 흘깃, 등 돌리는 얼굴들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느닷없이
검은 손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기도 하지만
코 틀어막은 손가락 두 개
길을 종종댔다 가출한 동정은 따스한 눈으로 건너와
두 손에 건네지는
차가운 금속성, 혹은 쨍그랑 앞뒤로 젖혀지는
하루의 질책
외따로 떨어져 잠든 종이박스 왈칵 들춰보고 싶은 충동에 등 푸른 계단 아래로 굽고
마지막 통화와 함께 사라진 욕설
화석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서울을 떠날 때마다
뒤 돌아보는, 세 살 터울 같은 습관
네모난 풍경에 갇히고
계절마다 찾아오는 잦은 외출이 해감 될 즈음
면역력 약한 삶 하나가 환절기를 넘지 못한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오랜 세월 귀에 머물던 절벽의 야유에서 이명의 꽃 피었다 지고
서울역 지하도 지나갈 때면
앞만 보고 걸었다 봄은
웅크린 몸에 푸른 물 불러들이는
소란한 감전
붉은 신호등에 숨겨둔 하얀 비명
화들짝, 길을 건넜다
*시집/ 홀연, 선잠/ 천년의시작
자목련 - 김정수
나무 위로 전선 지나간다며
무지막지하게 가지 잘린 나무
봄이 와도
꽃을 피우지 못한다 생은
햇빛 마중하는 일인데, 그대로
울음통이다 안으로 잦아드는 통에
새 한 마리 불러들이지 못하는
그 나무 곁을 지나다닐 때마다
보면 안 되는 걸 본 듯
들으면 안 되는 걸 들은 듯, 하여
일부러 멀리 돌아다녔다
내 안의 울화통 밖으로 들썩이던
어느 무심결에
꽃 한 송이 밀어 올린
자목련을 보았다 한번은 쏟아내야 할
화, 마침내 세상에 드러냈다
두고두고 속으로 꽃 피운
환장하게 고운 빛깔이다
# 김정수 시인은 1963년 경기도 안성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서랍 속의 사막>, <하늘로 가는 혀>, <홀연, 선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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