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먼지의 무게 - 이산하

마루안 2021. 4. 3. 19:04

 

 

먼지의 무게 - 이산하


복사꽃 지는 어느 봄날
강가에서 모닥불을 피워 밥을 지었다.
쌀이 익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저녁노을 아래 밥이 뜸 들어갈 무렵
강 건너 논으로 물이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다.

문득 네팔의 한 화장터가 떠올랐다.
'퍽!'
'퍽!'
여기저기 불길 속으로 머리들이 터졌다.
사방으로 흩어진 뇌수를 개들이 핥아먹었고
아이들은 붉은 잿더미를 파헤쳐 금붙이를 찾았다.
인간이 재로 바뀌는 건 두 시간이면 충분하지만
가난한 집의 시신들은 장작 살 돈이 부족해
절반만 태운 채 강물에 버려지기도 했다.
그들은 언제나 머리를 가장 먼저 불태운 다음
마지막으로 두 발을 태웠다.
나는 한동안 생각을 지탱한 머리와
세상을 지탱한 발을 비교하며
삶의 무게를 저울질하다 재처럼 풀썩이고 말았다.
인간이 어떤 것의 마지막에 이른다는 것
그 지점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먼지의 무게를 재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

밥이 뜸 들어가는 저녁마다 난 여전히
시를 짓듯 죄를 지었고
죄를 짓듯 시를 지었다.
오늘따라 논물이 강물보다 더욱 깊어가는 것도
단지 먼 길을 돌아온 세월 탓만은 아니리라.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인생목록 - 이산하


흙으로 돌아가기 전
눈물 외에는
모두 반납해야 한다는
어느 노승의 방

구름 같은 이불
빗방울 같은 베개
바람 같은 승복
눈물 같은 숟가락
바다 같은 찻잔
낙엽 같은 경전

그리고
마주 보는 백척간두 같은
두 개의 젓가락과
허공의 바닥을 두드리는
낡은 지팡이 하나.....

 

 

 


# 이산하 시인은 1960년 경북 영일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필명 '이륭'으로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한라산>,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가 있다. <악의 평범성>은 22년 만에 나온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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