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달을 뽑았다 - 정선희

마루안 2021. 3. 31. 22:16

 

 

달을 뽑았다 - 정선희


타로카드를 뒤집는다
생각이 많아서 달이 되었군요
길들여진 늑대와 길들지 않은 개가 달을 향해 짖고 있다
달빛에 이끌려 가재 한 마리 물 밖으로 나오고 있다
오늘은 초승달이 되었다가 내일은 보름달이 되었다가

어떤 말을 믿어야 할지
잠이 오지 않아요
어떻게 없던 일이 될 수 있나요
이미 두 손이 피투성인데

끄덕임과 악수 사이를 오가며
충혈과 소름의 차이를 이해한다

내 머릿속에 뜬 달이 자라는 속도로
시소가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기운다

패를 뒤집는다
퀭한 눈동자가 달처럼 어둠 속에 박혀있다

나는 지금 하현으로 기우는 중이다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상상인

 

 

 

 

 

저, 붓다 - 정선희


자는 건가 죽은 건가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표정이 뻥 뚫린 사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모자를 고쳐 쓰는 사람

자는 건가 죽은 건가
죽은 듯 눈길을 끄는 개가 있다

자는 것이 죽는 것이라는 사람과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다

지나치는 발길에 밟히면 어쩌나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않는 마음처럼
그 자세로 일어서지 않으면 어쩌나
그 모든 의심 너머에서 태평스럽게 자는

붓다

저 믿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절집에 왔다가 한 수 배운다
잠이 저렇게 깊고 고요하다면
죽음이 저렇게 평화롭다면

나를 여전히 의심하는 내가
개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
슬그머니 주차장을 빠져나오고 있다

 



# 정선희 시인은 경남 진주 출생으로 2012년 <문학과의식>, 201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푸른 빛이 걸어왔다>,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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