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 - 김대호

마루안 2021. 3. 30. 22:27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 - 김대호


나이를 먹으면서 체중이 늘었다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 딱딱하게 내 몸을 구성하던 물질들은
치아를 시작으로
깨지고 연화되었다
까칠했던 성격은 유연성하고는 상관없이 말랑해졌다
모든 것이 작은 알갱이로 퇴화하면서
내 몸은 모래언덕을 가진 하나의 사막이 되었다
무릎에도 바람이 들고
풍이 오려는지 한쪽이 자주 마비되었다
모래언덕에는 매일 바람이 불어
언덕의 지형이 매일 바뀌었다
그러면서 언뜻언뜻 모래언덕의
깊은 지층에 묻혀 있는 유물이 보이는 듯도 했다
그것은 꿈결에서나 잠시 보이던 내 근친들이었다
내 몸 안에 거처했지만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근친 내 유물들이여

딱딱하고 까칠한 조직에 걸려
깊은 지층에서 내 불쌍한 야망과 동선을 걱정했을
내 근친 내 유물들이여
난 요즘 감정과 기분 외부의 소란까지 모두 모아서
씨실과 날실로 고요를 깁는 중이다
어느 날 내게도 극심한 혼수상태가 찾아온다
그때
모래먼지를 털고 깊은 지층에서 나온 내 근친들이
내가 미리 준비해 둔 고요를 펴서
앙상한 내 몸을 덮어주고
비로소 우주 어딘가로 복귀할 것이다


*시집/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걷는사람

 

 

 

 

 

 

이후의 주소 - 김대호


누군가 내게로 오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내게 닿을 수 없도록 여러 번 주소를 옮겼다
나는 아직도 눈 오는 밤을 설명할 수 없어요
내게 닿아 미끄러지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걸요
미역국을 먹다 체했을 때
양말에 구멍이 났을 때
그때 느꼈던 슬픔은 사소했지만 오래 지속되었어요
당신이 나를 설명하고 내가 당신을 이해했을 때
우리는 헤어질 수 있었다
무엇인가 내게로 온다
푸른 저녁
황망한 부음 소식이 내게로 왔다
나는 언젠가 어딘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푸른 저녁의
익숙한 일부가 될 것이다
낮과 밤의 고운 입자가 될 일이다

 

 

 

# 김대호 시인은 경북 김천 출생으로 2012년 <시산맥>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가 있다. 2019년 천강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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