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발라드의 끝 - 황동규

마루안 2021. 3. 29. 19:50

 

 

발라드의 끝 - 황동규


개나리 필 무렵 성했던 눈마저 
황반변성 안구주사 맞기 시작했다. 
앞으론 확대경 없이 신문 읽을 생각 말게! 

안됐다는 듯 서달산이 아지랑이 피워 올리고 
노랗고 하얗고 빨간 꽃들을 꾸역꾸역 뱉어낸다. 
아지랑이 자욱이 오르는 오솔길이 
한때 마음 되게 빼앗겼던 발라드 같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난 삶의 반절은 괜히 바쁘게 살았다. 
우연히 들어보니 가뿐한 호박. 
나머지 반도 볼 것 못 볼 것 미리 가리지 않고 
제대로 살았던가? 

봄이 몸살 톡톡히 앓고 있는 곳, 
오솔길 구비를 돌자 
눈이 밝아진다. 
아지랑이 속에서 하양 노랑 나비들이 
화들짝 날아오른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세필(細筆) 춤사위들이 시각(視覺)을 춤추게 한다. 
눈높이가 여직 이토록 눈부실 줄이야! 

발라드는 끝머리에서 
삶을 가볍게 날려 보내는 황홀을 노래했지. 
황홀 뒤엔 지나온 길만 무겁게 남았던가. 
황홀 속에 나비들이 일제히 춤추며 날았다면 
발라드가 눈부신 오솔길로 이어지진 않았을까?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 

 

 

 

 

 

 

삶의 앞쪽 - 황동규 


해 질 무렵 
해 넘어가는 곳으로 몰려가며 불타는 조개구름들 
저녁 해 받으며 
둥지로 가는 새들이 서로 주고받는 나직한 날갯짓들 
다 한없이, 한없이, 마음 끌지만, 
내가 갈 때는 삶의 안쪽 
해 동트는 쪽으로 몸 돌린 채 가게 해다오. 
동해안 펜션이 좋지만 
해 돋는 곳이면 그 어딘들 어떠리. 
어떤 파스텔 톤이 제대로 뜰 수 있으랴. 
어둑한 하늘 한켠에서 
지상의 밝은 꽃잎들 가려 모아 우린 꽃물 
스멀스멀 번지는 저 황홀을? 

그래, 다시 하루다. 
꽃잎 흩날리는 하루, 낙엽 밟히는 하루를 
가리지 않고 살았다. 
그 하루들 가운데 내일이 도통 뵈지 않는 하루엔 
나도 모르게 향하던 방향을 잊지 말자. 
언젠가 몸이 망설이다 마음 덜컥 내려놓으면 
그 방향에서 생판 모를 형상으로 죽음이 동틀 거다. 
혹시, 무심히 지나치던 고인돌들이 
벌떡 일어나 배꼽춤 추는 황홀? 
거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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